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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horts
2025.04.05

북산의 꽃

불면의이쑤신

3월. 북산고등학교 농구부 매니저 이한나와 주장 채치수, 부주장 권준호는 머리를 맞대고 입부 신청서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전교생이 보러 왔던 강백호와 채치수의 맞대결 겸 노출 쇼(?) 덕분인지 생각보다 제법 많다. 문제아 강백호의 입부신청서는 방금 채소연이 대신 제출하러 왔다. 온 김에 함께 입부신청서를 구경하던 중이었다.

어떤 신청서에서 채치수의 커다란 손이 딱 멈췄다.

"!"

"어머."

"헉, 치수야... 이거 설마?"

이한나와 권준호가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채소연은 입을 손으로 막고도 비명을 참지 못했다.

"꺅! 진짜 서태웅 선수예요?!"

'입부서'라고 굵게 인쇄된 글씨 아래로 늘어선 인적 사항. 농구부. 1학년 10반 22번. 서태웅.

올 것이 왔군. 채치수와 권준호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심각한 얼굴과 곤란한 얼굴이었다.

서태웅은 여자다. 북산에는 여자 농구부가 없다.

하지만 서태웅이 졸업한 신라중학교에도 여자 농구부는 없었다.

그럼에도 서태웅은 1학년 때부터 농구부 소속이었고, 꾸준히 지역대회에 출전했으며, 3학년 때는 주장까지 맡았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지역에서 서태웅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농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았다. 농구를 하는 사람의 가족들도 다 알았다. 예를 들면 채소연, 송아라. 한 번만 경기를 봐도 잊을 수가 없었다. 서태웅은 그랬다.

꼭 여자라서만은 아니었다. 처음 서태웅의 경기를 본 사람은 여자인 줄도 잘 몰랐다. 그냥 좀 많이 예쁘게 생긴 남자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182cm. 지금은 187cm. 웬만한 남자 선수들보다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청난 돌파력. 가볍고 빠르고 정확하다. 적어도 근처 지역 중학교 수준에서 서태웅을 따라갈 수 있는 선수는 남녀를 통틀어 아무도 없었다.

만약 신라중이 전국대회에 갔다면 서태웅은 뉴스에도 나왔을 것이다. 성별의 벽을 깬 홍일점 어쩌구저쩌구하는 헤드라인을 뽑아서. 아쉽게도 신라중에는 미친 스코어러 서태웅을 뒷받침할 전력이 부족했다. 서태웅은 혼자 50점을 득점하고도 전국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유일한 약점은 스태미나. 한 경기 정도는 나 홀로 하드캐리할 수 있었지만, 두세 경기 연속으론 역부족이었다.

농구를 끝내주게 잘하는 여중생. 흔치 않았다. 키가 큰 여학생들은 보통 배구를 했다. 서태웅도 3년 내내 끈질긴 배구부 영입 제안을 받았다는 소문이다. 그래도 더 끈질기게 거절하고 농구공을 잡았다고. 연습할 때도 경기할 때도 라커 룸 대신 화장실 개인 칸에서 혼자 옷을 갈아입고, 땀투성이인 채로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서 샤워하면서도.

실력으로도 멘탈로도 서태웅이 보통 독종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북산 농구부에 없었다. 얼마나 농구에 미쳐있는지도. 안한수 감독은 물론 이한나도 채치수도 권준호도 송태섭도 채소연도 송아라까지 알았다.

모르는 사람이 딱 두 명 있었다. 농구 초짜 강백호.

그리고 도쿄에서 전학 온 윤대협.


"내가 이 멀대 같은 여자보다 뒷번호라고?! 절대 인정 못 해!!!"

아니나 다를까. 새 학기 부 활동 첫날부터 천지 분간 못 하는 강백호가 날뛰기 시작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남자의 자존심'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채소연이었다. 서태웅은 채소연의 우상이었다. 우상이라는 말로 부족했다. 채소연의 판타지, 롤모델, 이루지 못한 꿈의 실현이었다. 채소연은 서태웅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같은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감격인 모양이었다.

으으윽,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거야! 강백호는 자신이 채소연의 관심 순위 속에서 같은 학년 여자애보다도 밀린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쉽게 잡을 수 있는 트집은 역시 그것이었다. 그래봤자 여자잖아!

강백호가 서태웅 주변을 정신 사납게 빙빙 돌면서 중얼거렸다.

"잘 보면 뼈도 가늘고 툭 치면 쓰러지겠구먼. 무슨 수로 남자 농구부에서 뛰겠다고?"

서태웅은 싸늘한 표정으로 정면만 쳐다봤다. 강백호는 울컥했다. 눈높이가 맞을 정도로 키가 큰 여자. 한순간도 웃지 않는 여자. 이 천재보다 농구를 잘하는 여자...! 강백호가 가진 가장 미운 마음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쪽저쪽 기웃거리며 쫑알거린다.

"여자는 스포츠를 잘해봤자 남자한테 인기가 없다고. 아니면 배구부에서 여자들과 운동하란 말이야. 괜히 낄 생각하지 말그억!"

쉼 없이 까불거리던 강백호가 코부터 코트에 자빠졌다. 서태웅이 발을 걸었기 때문이다. 턱을 괴고 구경하던 윤대협이 풉 웃었다. 이 여우 같은 기집애가ㅡ! 강백호가 요란하게 쉭쉭 대며 일어났다.

"안돼 백호야! 진정해. 태웅이가 놀라잖아!"

채소연이 강백호의 손목을 붙들고 말렸다. 막상 서태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강백호는 금방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아, 아니 소연 씨. 그렇다고 제가 설마 여자를 때리기라도 한다고... 하하하."

멋쩍게 웃는 강백호의 얼굴로 농구공이 날아왔다.

퍽! 이목구비가 뭉개지는 무자비한 소리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

공을 던진 건 서태웅이었다.

"야. 원숭이."

찰랑거리는 숏컷 머리칼 아래로 까만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승부다. 일 대 일. 니가 이기면 사라져 줄게."

코피를 닦던 강백호가 눈을 번뜩였다. 오호라.

"대신 니가 지면."

좌중이 침을 꿀꺽 삼켰다.

"누나라고 불러라."

크하하하! 윤대협의 맑은 웃음소리가 코트에 메아리쳤다.


서태웅은 강백호를 봐주지 않았다. 처참하게 짓밟았다. 보는 사람이 민망해질 정도의 압도적이고 일방적이며 무자비한 게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10분이었다. 조롱에 가까웠다. 스킬도 스킬이지만 압도적인 스피드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강백호도 초짜 치고는 엄청난 순발력이었는데도 그랬다. 가장 비참한 장면은 강백호가 어떻게든 힘으로 서태웅의 유니폼이라도 붙들어 보려고 했는데 스치지도 못하고 농락당했을 때였다. 룰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충격적인 건 덩크슛이었다. 하프라인에서부터 뛰어온 서태웅은 강백호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날아올라 아슬아슬하게 림에 한 손 끝을 걸쳤다. 과연 윤대협도 눈이 커졌다.

서태웅은 지금까지 자신을 몰랐다 해서 앞으로도 모르도록 내버려두는 선수가 아니었다.

전의를 상실한 강백호 앞에 서태웅이 우뚝 섰다. 손가락 끝에서 농구공을 돌리며 묵묵히 쳐다본다. 빤히 쳐다본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는다. 강백호의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머리카락 색깔과 비슷해진다. 우물쭈물 입술을 내민다.

"서태웅... 누..."

서태웅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누..."

모두가 강백호의 쭉 내민 주둥아리를 쳐다봤다.

"누우가 너 같은 거 누나라고 불러 준대!!!!!"

역시 실패.

서태웅은 놀라지도 않았다. 어깨만 으쓱하고 돌아섰다. 그게 강백호를 더 빡치게 했다. 벽에 머리를 쾅쾅 박기 시작한 강백호를 채소연만 쫓아가서 허둥지둥 말렸다.

가장 시끄러운 멍청이는 하나 제꼈고. 서태웅은 선배들과 동기들을 휙 둘러봤다. 많이 본 표정들이다. 질렸다는 표정. 얼빠진 표정. 순수하게 놀란 표정. 서태웅은 코트 위에서 남자들의 얼굴에 긴장을 띄우는 데 익숙했다. 혼성 게임이 자연스러웠던 미니바스를 졸업한 이후부터 쭉 그렇게 농구해 왔다.

부숴버려야 하는 건 상대 팀뿐만이 아니었다. 아군의 편견. 불신. 경이를 넘어선 경악. 망설임. 그런 것도 함께 부숴버려야 했다. 항상 최고여야만 했다. 그래야만 팀플레이가 가능했다. 패스가 돌아오고 점수를 넣을 수 있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누구에게도 질 생각이 없었으니까.

서태웅이 담담하게 말했다.

"또 덤빌 사람?"

어떻게 들어도 도발이었다.

막상 서태웅은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다소 요란하긴 했지만, 강백호 같은 반응은 완전히 예상 범주였다. 서태웅은 남자였다면 필요치 않았을 시험 관문을 통과하는 데에 이골이 나 있었다. 그냥 눈으로 보여주는 게 가장 빨랐다. 할 거 하고 이제 농구했으면. 그런 생각뿐이었다.

이한나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태웅아, 그럼 여기서 제일 잘하는 사람하고 일 대 일로 붙어 볼래?"

서태웅의 눈이 번뜩였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시험이 아닌 최고를 이기기 위한 시합. 언제나 바라왔던 대결이다.

이한나가 맹수의 시선을 조련하듯 부채 끝으로 누군가를 척 가리켰다.

"엥? 나?"

다소 얼빵한 표정의 윤대협이 그 부채를 따라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태웅이 던진 공이 쉭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윤대협은 얼떨결에 두 손을 올렸다. 공에 부딪힌 손바닥이 제법 얼얼했다. 확실히 보통 여자애는 아니다.

"승부하자."

윤대협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곤란한걸...

일 대 일 대결은 윤대협의 승리였다.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중반부턴 다른 팀원들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입을 헤 벌리고 구경만 했다. 강백호조차 조용해졌다.

서태웅은 윤대협에 비해 확연하게 디펜스가 약했다. 그러나 돌파력은 비등했다. 앞선다고 느껴질 때조차 있었다. 처음부터 서태웅은 림을 쳐다보는 게 아니라 윤대협 뒤쪽의 빈 공간을 보고 들어갔다. 뭐랄까, 힘으로는 당할 수 없는 상대를 제끼는 데에 이골난 플레이였다. 압도적인 무게 차이를 이용한 포스트업만으로 제압할 수 없는 스피드와 창의적인 루트. 파고드는 척 영리하게 돌아서서 3점을 노릴 때는 윤대협도 속수무책이었다. 점수가 들어갈 때마다 박수가 터져 나올 정도의 화려한 승부였다.

윤대협이 무릎을 짚자 이마 선을 따라 굵은 땀방울 여러 개가 동시에 후두둑 떨어졌다. 지쳤다. 솔직히 처음엔 핸디캡이 없으면 불공정하지 않나 싶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푹 빠져 버렸다. 명백하게 즐겨버렸다. 약간의 죄책감을 동반한 짜릿함이 윤대협의 가슴을 간질거렸다.

서태웅은 반소매 티 위에 겹쳐 입은 유니폼 자락을 끌어 올려 이마와 목덜미를 훔쳤다. 반바지 아래 쩍 갈라진 햄스트링. 역시 보통 여자애가 아니다.

윤대협은 서태웅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처음 만난 여자애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황하기도 전에 서태웅이 툭 뱉었다.

"변태."

윤대협은 누가 배를 발로 찬 것처럼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축 늘어진 어깨를 권준호와 이한나와 이달재가 차례로 격려하듯 툭툭 쳐 줬다. 채치수는 한심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 큰 소리로 10분 휴식 후 기초 훈련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예! 서태웅도 함께 우렁차게 대답했다.


1학기 내내 서태웅은 북산의 돌아온 탕아들을 상대로 통과의례 역할을 해야 했다.

먼저 송태섭. 돌아오자마자 짝눈썹이 더 짝짝이가 됐다.

"왜 여자부원이 있어?"

녹초가 될 때까지 일 대 일을 당하고 코트에 드러누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졌습니다. 누나. 패스 드릴게요."

다음은 정대만. 이쪽은 농구 전에 주먹으로 한 대 맞았다. 농구공에 침 뱉어서. 삭발하고 돌아온 날에도 딴엔 진지한 조언을 해 줄 생각이었지만.

"중학교 때까진 어떻게 됐을지 몰라도 고등학교부터는 어렵지 않아? 일단 체중이 다르고. 무리하다 다치는 것보단 벤치가 낫잖아."

송태섭보다 훨씬 빠르게 녹초가 됐다.

"아이고 그래 누님이 에이스 하십쇼! 전 분명히 조심하라고 했슴다!"

서태웅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리에 쥐가 나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포기를 모르고 덤빈다. 타고나길 그런 성격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서태웅을 간단히 이길 수 있을 거라 전제했던 남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졌다. 원래 방심이 가장 무서운 적이다. 사실 송태섭도 정대만도 처음부터 진지하게 상대했다면 절대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얕잡아 봤기 때문에 허를 찌를 수 있었고, 당황하게 해서 흐름을 가져올 수 있었고, 혀를 내두를 때까지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질 수 있었다.

딱 한 명. 두 번째 판부터 웃음기를 지우고 덤빈 녀석이 있었다. 결국 이길 수 없었다.

그게 윤대협이다.

"선배님."

서태웅과 일 대 일로 붙고도 한 번도 서태웅을 누나라고 부른 적 없는 유일한 북산 농구부원.

"태웅아... 오늘은 안 하면 안 될까?"

그리고 훈련이 끝나도 서태웅에게 붙들려 집에 갈 수 없는 비운의 북산 농구부원...

"..."

윤대협이 집에 가고 싶다고 낚시하고 싶다고 드러눕고 싶다고 우는소리를 할 때마다 서태웅은 꾹 다문 입술을 조금 내밀고 농구공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윤대협의 발끝을 쳐다봤다. 윤대협의 뒤통수에 식은땀이 스며 나오고 가슴 속에는 죄책감이 쌓일 때쯤에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딱 한 번만요."

거기까지 하면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웠다. 기본적으로 상냥한 성격이라서도 있지만.

"그럼 그럴까?"

어쨌든 윤대협도 남자였다. 미인의 부탁에는 마음이 약해졌다.

한 번 정도 튕겼다가 받아줄 때 순식간에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가. 기세 좋게 끄덕이는 박자에 맞춰 찰랑거리는 머리칼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귀여웠다.

그래서 윤대협은 북산고 특유의 자율적인 훈련 방침에도 불구하고 매일 같이 자발적으로 지옥 훈련에 빠졌다...

혼자가 아니라서 버틸만했다.

아니 실은 제법 재미있었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은 없지만.

서태웅이 입학하기 전, 북산 농구부의 명물은 윤대협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윤대협을 응원했다.

그러나 윤대협은 서태웅처럼 내놓고 구경거리였던 적은 없었다. 북산 농구부의 꽃, 홍일점, 왕자님... 왕자님?

여학교도 아닌데 서태웅에게는 자연스럽게 그런 타이틀이 붙었다. 뜯어볼수록 다카라즈카 남역 같은 느낌이긴 했다. 웬만한 남학생을 한참 내려다보는 훤칠한 키. 길쭉한 팔다리. 날렵한 턱선. 심플하면서 화려한 이목구비. 머리가 짙고 끝이 날렵한 눈썹. 찰랑거리는 숏컷...

그런 외모로 짐승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 홀로 날아오르는 돌격대장. 여학생들에게 서태웅은 동경의 대상인 동시에 지켜주고 싶은 모성애를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아주 환장을 했다. 윤대협에게 쏟아지는 응원과는 뭔가 또 결이 달랐다. 압도적으로 여성 비율이 높았다.

그린 듯한 미인임에도 정작 남학생들에게 서태웅은 지나치게 가파른 벼랑 위의 꽃이었다. 아무도 차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단 자신보다 20cm 더 큰 여자를 짤없이 올려다봐야 한다는 점에서 대다수 남학생들은 기가 죽어버린 모양이었다.

키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외칠 만한 기개가 있는 놈들은 봄바람을 허파 가득 빵빵하게 채운 채로 서태웅을 체육관 뒤로 불러냈다가 한 놈 한 놈 그 자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차였다는 뜻이다. 차인 뒤엔 금방 서태웅 친위대 사이에 소문이 돌았다. 용기가 가상하네. 거울... 보나? 거절보다도 가차 없는 여고생들의 수군거림이 훨씬 아프고 수치스러웠다.

여름방학이 가까워져 올수록 윤대협과 서태웅이 부활이 끝날 때마다 함께 개인 연습을 하고 나란히 하교하는 걸 목격하는 친위대가 늘어나면서부터 불온한 공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소문의 주인공은 단번에 윤대협이 되었다.

농구부가 실내 훈련을 할 때마다, 연습 시합을 할 때마다, 심지어 주말 부 활동 시간에도 어김없이 문가에 모여드는 갤러리들. 서태웅은 친위대를 목청 큰 우리 편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 편은 많을수록 좋지. 그 외에 아무런 코멘트도 없었다.

그러나 갤러리의 눈빛은 서태웅을 볼 때와 윤대협을 볼 때 확연하게 달랐다. 서태웅을 볼 때는 하트가 뿅뿅. 서태웅이 윤대협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윤대협까지 시야에 들어갔을 때는... 매와 같은 눈초리로 돌변했다.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지 않은 윤대협도 과연 아플 정도였다. 부담스러운걸...

그래도 다행히 한 번 집중하면 주변이 보이지 않는 스타일이라 방해는 아니었다. 이름도 모르는 타인들을 무시하는 편이 서태웅을 무시하는 것보다 훨씬 리스크가 적은 선택이기도 했다.

사실 서태웅은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포기를 모르고. 비겁하게 가진 수단을 다 썼다. 무작정 강요하기, 그러다가 또 후배랍시고 공손하기, 입을 꾹 다물고 윤대협 깊은 생각에 빠뜨리기, 삼백안을 형형하게 뜨면서 가녀리게(?) 조르기. 하나하나 임팩트가 큰 전략이었다.

윤대협은 그렇게 서태웅 껌딱지를 떼지 못한 채로 여름방학까지 탈탈 털렸다. 이것도 에이스의 숙명이라면. 차세대 에이스를 키워야겠지. 윤대협은 거절할 권리가 없다고 느꼈다. 성심성의껏 휘둘려 주었다.

체력을 키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음... 같이 해변이라도 뛸까? 끄덕끄덕.

선배. 승부해요. 넌 시합 때나 일 대 일 때나 플레이가 같아. 재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어. 전국에 가면 선배보다 나은 녀석이 있을까요? 글쎄. 나도 안 가 봐서 모르겠는데...

체육관에서 나머지 연습을 하거나 땡볕 아래 해변을 달리거나 야외에서 몇 시간이고 농구하는 건 필연적으로 온몸이 축축하게 젖을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북산고 체육관엔 샤워실이 없었다. 서태웅 혼자서 집에 갈 때까지 씻을 수 없었던 중학교 시절과 달리 모두 평등하게 땀 냄새를 풍기며 귀가했다.

윤대협은 서태웅과 단둘이 훈련한 후에 절대로 서태웅을 혼자 보내지 않았다. 집까지 바래다줬다. 그리고 패션에 간섭했다.

"저지. 가져왔어?"

"네."

"그래. 잘 입고 가. 열사병 걸리지 않게."

오히려 열을 가두면 안 좋은 거 아닌가? 서태웅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농구하며 윤대협 말 들어서 손해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얌전히 따랐다.

열사병은 택도 없는 핑계였다. 윤대협은 그냥 서태웅이 푹 젖은 면 티셔츠 한 장을 상체에 딱 붙인 채로 나돌아다니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서태웅이 현관문을 닫고 나서야 윤대협은 한숨을 쉬었다. 짧게 민 뒤통수를 벅벅 긁는다.

너무 붙어있었던 걸까?

농구는 신체접촉을 피할 수 없는 스포츠다. 윤대협은 점차 위기감을 느꼈다. 아무리 서태웅 친위대가 떼로 몰려 와 강렬하게 째려보며 압박한대도 끄떡없었던 윤대협이. 가장 무서운 무기는 외부로부터의 시선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시선이다. 자꾸만 어디로 이끌리는지. 그 시선에 누가 상처받을 가능성이 있는지.

농구를 제대로 할 수 없으면 이 관계는 망한다. 뭐가 됐든 망한다. 단순한 농구부 선후배 사이도, 지금까지 쌓아 온 최소한의 신뢰와 친밀감조차도 지키기가 어렵다.

당분간은 거리를 두는 게 최선일 수도...


실패했다. 서태웅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어이."

부 활동이 끝나자마자 냉큼 집에 가려던 윤대협이 흠칫했다. 선배들은 가던 길 계속 가고 강백호와 채소연과 다른 1학년들이 돌아본다.

"아앙? 지금 나한테 시비 털었냐 여우?"

가장 먼저 반응한 건 강백호였다. 서태웅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다. 강백호는 씩씩거리며 퇴장한다. 다른 1학년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얼굴을 마주 본다. 채소연이 상냥하게 묻는다.

"태웅아, 누구한테 한 말이야?"

윤대협은 어쩐지 뒤통수를 당기는 느낌에 살금살금 소리 내지 않으면서 잰걸음으로 체육관 문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

그의 종아리를 정확히 노리고 서태웅이 농구공을 던졌다. 윤대협은 꺅 소리를 내며 피했다. 아. 대협 선배였구나. 1학년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우르르 귀가한다. 채소연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서 있다.

"승부해."

반토막이 난 험한 말투에도 뭐라 기강 잡기 곤란하다. 피했던 건 사실이니까.

윤대협은 구석으로 굴러가는 농구공을 괜스레 천천히 쫓아가서 주워 왔다.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시선을 피하고 싶어서다.

서태웅은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발 앞에 뭐가 있다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이마가 붙을 정도로 가까이 와 있었다.

다섯 걸음 멀리서 지켜보던 채소연이 두 사람의 입술이 붙는 줄 알고 헉 소리를 냈다. 윤대협은 소리도 못 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굳었다.

서태웅이 주먹을 꾹 쥐었다. 무어라 말할 듯 입을 벌렸다가. 다시 어금니를 꾹 물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맞닿아 뭉개진다. 무언가를 참는 듯이 좁혀진 미간.

얼굴을 맞붙이고 서 있는 윤대협에게만 보였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너도 여기까지냐."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너도 내가 여자라고 생각해?"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농구선수가 아니고?"

점점 떨렸다.

"동료가... 아니고?"

약간 축축했다.

윤대협은 입을 다물었다. 냉정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아주 중요한 걸 영원히 놓칠 수 있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윤대협은 승부처를 놓치는 타입이 아니다. 그런 에이스는 없다.

윤대협은 꾹 쥔 채로 떨리는 서태웅의 주먹을 본다. 탄탄한 상체 위에 부드러운 어깨선을 본다. 누구보다 강인한 눈동자에 배어 나온 억울함을 본다. 끝까지 떨어뜨리지 않는 눈물을 본다.

서태웅은 고등학교 농구부 데뷔라고 할 수 있는 공개 연습 경기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고등학교 2~3학년 사이에서 조금만 부딪혀도 버티기 힘든 체격 차가 있었음에도, 골밑이 탄탄하고 강력한 스크린이 가능한 북산이라면 핀 포인트 공격수로 쏠쏠히 써먹을 수 있었다. 첫 경기에선 모두의 허를 찔렀고 그 다음부터는 대비책을 세워야 할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전국대회 예선을 비롯한 정식 경기에는 나가지 못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남자 고등부 대회에 서태웅을 출전 선수로 등록할 방법이 없었다. 북산이 전국대회 진출을 확정 짓는다 해도 서태웅은 벤치도 아닌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한다. 여자 농구부가 있는 곳으로 전학을 가는 것이 최선일 텐데. 이상하게도 서태웅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윤대협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오른손을 가져와서 조심스럽게 주먹을 폈다. 따스한 물이 감싸는 듯한 움직임. 서태웅도 뿌리치지 않았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딱딱한 손바닥을 쓰다듬었다. 아주 짧게 자른 손톱조차 손바닥에 자국을 낼 정도로 세게 쥐고 있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윤대협이 제 손길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너와 농구하는 걸 좋아해."

더없이 진지했다.

"아주 좋아해."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채소연이 두 손으로 입을 꾹 막았다.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았다.

"좋아해..."

마지막 세 글자는 서태웅의 귓가에만 속삭였다.

서태웅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윤대협에게 손을 붙잡힌 채로. 우뚝 서 있었다. 농구 골대처럼.

윤대협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가장 애가 타는 건 구경하는 채소연이었다...

강산이 다섯 번쯤 바뀐 거 아닌지 의심할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서태웅이 움직였다.

윤대협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농구공을 잽싸게 뺏더니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골대로 돌진한다. 날아오른다.

그린 듯한 원 핸드 덩크슛.

공중에서 슬로우모션처럼 찰랑이는 까만 머리칼 주변으로 빛무리가 퍼졌다.

윤대협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감탄했다. 큰일 났다. 서태웅이 천사로 보이기 시작한다.

농구의 천사가 의기양양하게 돌아서서 외친다.

"2점. 내가 먼저 땄어."

오늘도 거부할 수 없는 승부를 마음대로 시작해 버린다.

잠깐 뛰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볼을 물들이고.

윤대협도 덩달아 볼이 빨개진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상냥하게 웃는다.

"자, 그럼 가볼까?"

천사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윤대협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있잖아 태웅아."

채소연이 서태웅에게 속삭인다. 질펀한 승부가 끝나고 윤대협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탈진하여 드러누워 있는 틈을 타서.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던 서태웅이 얼굴에 물음표를 달고 허리를 숙여 귀를 기울여 준다.

"아까 윤대협 선배가 뭐라고 했어?"

서태웅은 입을 꾹 다문다. 귀 아래가 약간 빨개진다.

그것만으로도 채소연은 무슨 이야기였는지 알 것만 같다. 어떡해 어떡해. 입가를 가리고 발을 동동 구른다. 나중에 꼭 자세히 물어봐야지.

서태웅은 공연히 근처에 구르던 공 하나를 잡아 성난 듯이 드리블을 시작한다. 체육관 바닥 전체를 울리는 요란한 소리에 드러누워 있던 윤대협이 고막을 공격받고 두 귀를 막으며 으으으 돌아눕는다. 후후 웃으면서 채소연이 주저앉아 농구공을 만지작거린다.

"아까 덩크 말이야. 너무 멋있었어. 여자 선수도 덩크슛을 할 수 있구나."

서태웅이 손가락 세 개를 불쑥 내민다.

"딱 세 번 해봤어. 아까 그거까지."

"정말? 역시 태웅이한테도 어려운 거구나. 그렇게 키가 큰데."

서태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중학교 3년간 단 한 번밖에 성공한 적 없는 덩크슛을 북산에 와서 1년에 두 번이나 했다. 비록 둘 다 비공식 연습에서였다지만. 서태웅의 점프력이 극에 달한 건지, 아니면 북산 인간들이 서태웅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 투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바람에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건지.

채소연의 눈이 반짝거린다.

"정말 멋있어. 나도 태웅이처럼 계속 농구하면 좋았을 텐데..."

서태웅이 드리블을 멈춘다. 채소연에게 손을 내민다. 어리둥절한 채로 채소연은 서태웅에게 일으켜진다. 농구공을 건네받는다.

"하자. 지금."

"지, 지금?"

끄덕끄덕. 서태웅이 터벅터벅 걸어가 아직도 드러누워 있는 윤대협의 정강이에 발길질했다. 윤대협은 누운 채로 여유롭게 피했다. 서태웅의 눈썹이 심상치 않은 곡선을 그리는 걸 곁눈질로 확인하자마자 냉큼 일어난다.

"다 쉬었어?"

뻔뻔하게 그런 소리나 한다. 서태웅은 코웃음을 치고 선언했다.

"이 대 일이다. 나랑 채소연. 그리고 너."

"어라. 내가 너무 불리한 거 아닌가."

바로 그때 타이밍 좋게 누군가가 큰 소리로 체육관에 등장했다.

"천재 등장!!! 엇, 소연아! 뭐 하고 있었어?"

윤대협과 서태웅을 발견하자마자 손가락질을 한다.

"이런 재수 없는 녀석들이랑 있으면 천사 같은 소연이에게 재수 없음이 옮는다!"

윤대협은 하하 웃었다. 서태웅은 한숨을 쉬었다. 강백호에게 바운드패스를 던진다. 윽! 기습인데 제법 바스켓맨답게 받아내는 강백호를 향해 서태웅이 선언한다.

"이 대 이다. 나와 강백호 대 윤대협과 채소연."

"그딴 게 어딨어!!!!!!!!!"

당연히 뒤따르는 강백호의 사자후에 윤대협과 채소연이 귀를 틀어막았다.

"누가 너 따위랑 한 팀 먹는대?!"

"그럼 윤대협이랑 하든가. 성별 대결이네."

"눗... 그 그건 좀...!!!"

"어쩌라고. 나랑 윤대협은 밸런스가 안 맞잖아."

"크윽...!!!"

아무리 짱구를 굴려 봐도 더 나은 대안이 없어 두 손으로 공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강백호. 서태웅은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하프코트에 서서 윤대협을 마주 본다.

"선공 정해."

윤대협이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인다.

"레이디 퍼스트."

서태웅은 코웃음 쳤다. 고개를 까딱여 채소연을 가리킨다.

"그쪽에도 레이디가 계신데."

"이런. 실례했네. 그럼 이쪽 레이디부터?"

윤대협이 채소연을 에스코트하듯이 코트로 데려온다. 강백호가 길길이 날뛰며 따라와 손날을 세워 촙! 연결을 끊어낸다.

채소연은 공을 들고 하프라인에 섰다. 윤대협이 골 밑에서 기민하게 움직이고 서태웅이 바짝 따라붙어 엎치락뒤치락 가로막는다. 강백호는 어설프게 굳은 얼굴을 하고서도 착실하게 골대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채소연의 드리블이 시작됐다.

이 대 이 승부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