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의 수사학
불면의이쑤신
로트링겐 님 <혐관의 미학> 축전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계절에 민감하다. 지구상의 동식물을 섭취하는 입장으로서 제철이라는 중대한 사항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같은 재료라도 2월이냐 8월이냐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다르거나, 가격이 천장과 지하거나, 심지어는 구할 수도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디저트. 과일은 기온에 따라 쉽게 무르고 맛이 변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온실과 하우스의 시대가 왔다 해도, 가장 맛 좋은 철은 분명히 따로 있다. 복숭아나 무화과 같은 건 연중 두세 달 겨우 맛볼 수 있으며, 이제 거기서 품종 따지기 시작하면 더더욱 시기 변수가 중요해진다.
당연히 케이크, 타르트, 구움 과자 좀 한다는 짱짱한 파티세리(한국에선 다 싸잡아 ‘카페’라고 부르지만)에서는 아름답고도 풍부한 맛의 계절별 시그니처 메뉴를 개발해서 부지런히 내놓는다. 겨울부터 봄까지는 귤, 레몬, 딸기, 체리, 여름에는 복숭아, 멜론, 가을에는 샤인 머스캣, 무화과... 그러면 나 같은 호구들은 신나게 돌아다니면서 이 집 저 집 맛을 비교하고 최애 가게를 찾고 주변에 추천하고 잔고를 줄여 행복을 산다.
그런 의미에서, 9월은 당연히 몽블랑이다.
몽블랑 사냥의 계절이 돌아왔다. 나는 원정대를 꾸렸다. 주 5일 중 3일을 야근하고 주말에도 나오라던 미친 회사를 지난달에 드디어 관둔 친구 하나. 상반기에 연차를 하나도 못 썼는데 직장에서 11월까지 연차의 65%를 소진하라고 압력이 들어왔다는 친구 하나. 그리고 카페 근무가 가능한 재택근무자, 그게 나다. 이 원정대의 가장 큰 장점은 평일 오픈런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웬만큼 유명한 카페라고 해도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
한국에서 몽블랑은 대체로 ‘밤 크림이 메인인 타르트’다. 물론 요즘은 몽블랑 수플레, 푸딩, 휘낭시에, 파르페, 어쩌구 저쩌구 밤 크림을 테마로 다양한 디저트가 늘어나긴 했지만. 클래식 몽블랑은 대체로 밤처럼 끝이 뾰족하고 동그란 모양이거나, 국수 같은 밤 크림 가닥을 동글동글 말아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타르트지의 두께, 식감, 재료가 모두 다르고, 안에 밤 크림 이외에 어떤 크림이나 무스나 재료를 넣었는지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다. 럼과 꿀에 조린 밤을 통째로 넣는 시원시원한 취향도 있고, 딸기나 라즈베리 같은 상큼한 과일을 첨가하는 곳도 있다.
함정이 있다. 이렇게 다양하다 보니 뭐가 제일 맛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냥 취향이다. 게다가 나처럼 호불호가 강하지 않은 입맛이라면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황희정승이 따로 없다. 결국 어떻게 되느냐. 호구처럼 돈을 많이 쓰게 된다. 뭐 만족도는 높으니까 나쁘지 않지만.
오늘의 몽블랑 사냥터는 서울 한복판의 데이트 코스에 자리 잡은 제법 유명한 베이커리 카페다. 주말에 가면 절대로 앉을 수 없을 것이다. 금요일부터 위험하다. 그래서 원정대는 수요일을 골랐다. 심지어 오픈도 이르다. 오전 8시. 아무리 그래도 연차 내고 출근 시간보다 일찍 집을 나서는 건 무리라는 생각에 적당히 9시에 모였다. 이것도 어지간히 디저트에 미친 놈들만 가능한 집합 시간이다.
가게엔 아무도 없었다. 수도권 내 꽤 유명한 카페에선 흔히 경험하기 어려운 사치에 흥분한 여자 셋은 전세 낸 듯 떠들었다. 곱게 결을 낸 연갈색 크림을 산처럼 뾰족하게 올려서 꼭대기에 조린 밤을 얹은 몽블랑은 평범하게 맛있었다. 안쪽은 촉촉하고 바깥쪽은 바삭하고. 무엇보다 가격 대비 양이 푸짐해서 좋았다. 요즘은 아무리 맛있는 디저트도 새끼손톱만큼 나오면 감질나고 돈 아깝단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불경기는 불경기다.
10시쯤이었다. 딸랑, 작은 종을 때리면서 묵직한 유리문이 열렸다. 우리가 들어 온 이후 처음이었다. 반사적으로 세 명 모두 그쪽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우와 미친.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들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욕과 감탄사가 동시에 입을 빠져나갔다. 친구 한 명은 커피잔을 들어 올린 채로 입을 헤 벌린 채 굳어 버렸고, 나머지 한 명은 노골적으로 입틀막을 하며 눈을 떼지 못했다.
카페에서 목격하기엔 지나치게 잘생긴 남자들이었다. 키도 엄청 크다. 한 2m 되나? 얼굴은 조막만 하다. 연예인 중에서도 모델이 틀림없다. 살짝 작은 쪽은 새까만 가죽 라이더 재킷에 흰색 브이넥을 받치고 아래는 블랙 진. 얼굴이 미친 백옥같이 하얗다. 눈매가 날카롭다. 소싯적 읽던 인소에 나오는 싸가지 없는데 개 잘생겨서 인기 짱인 남자 주인공처럼 생겼다. 콧날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날렵한 게 그야말로 예술이다.
약간 큰 쪽은 덩치가 좀 더 볼륨 있어 존재감이 엄청나다. 살짝 물 빠진 청바지에 네이비색 항공 점퍼. 친구들이 태평양 같은 어깨에서 눈을 못 뗀다.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쌍꺼풀이 짙고 서글서글한 눈동자에 과할 정도로 완벽한 티존. 커다란 입술로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띤 채 쉴 새 없이 일행에게 뭔가 속닥거리고 있다.
극과 극의 미남. 그것도 두 명이나. 우리는 조금 전까지 접시가 깨질 정도로 꺄르르 떠들던 것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모든 신경을 미남 감상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를 틀어도 저런 놈들은 없다. 혹시 AI인가? 지금 이거 증강현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찰나 우리 중 유일하게 스포츠를 좋아하는 친구 중 한 명이 다급하게 핸드폰 액정을 손끝으로 두들겼다.
그가 단톡방에 올린 바에 따르면 미남들의 정체는 농구선수였다. 농구...! 정말 좋은 스포츠구나. 왜 이런 인재가 활약 중이라고 진작 말하지 않았지? 친구가 이름도 알려줬다. 블루 이글스 윤대협. 레드 드래곤즈 서태웅. 우리는 그 자리에서 프로농구 개막전을 검색했다. 다음 달이다. 개막전 대진표도 검색했다. 블루 이글스 대 레드 드래곤즈.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농구는 최고의 스포츠입니다. 우리는 농구란 골 많이 넣는 사람이 이긴다는 정도만 알면서 그 자리에서 티켓 예매를 마쳤다. 지금 디저트 먹으러 다닐 때가 아니었잖냐.
우리가 너무 고요하게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미남들의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리며 귓속에 쏙쏙 들어왔다. 메뉴를 고르는 데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음... 두 개? 세 개는... 질리려나.”
“여기 빵도 있고 크림 브륄레도 있네. 여러 가지 시킬까?”
상대적으로 더 작았던 서태웅 선수의 목소리가 한 톤 커졌다.
“뭔 소리야. 몽블랑이나 처먹어. 그거 먹이러 온 건데.”
“네.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먹으랄 때 먹었으면 좋잖아.”
“아니...”
“변명?”
와 싸운다 싸운다. 세 여자의 상체가 동시에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즉시 도파민 분출 가능한 콘텐츠로 집중하고 마는 현대인의 다소 천박한 본능. 안 그래도 빼쪽한 눈꼬리를 살벌하게 치뜬 서태웅이라는 미남자가 윤대협이라는 미남자를 노려본다. 장난 아니다. 눈에서 레이저 나와서 사망할 것 같다. 무슨 사연일까. 몽블랑 안 먹어서 원수진 사이?
윤대협 선수는 마주 목소리를 올리지 않았다. 놀랍게도 서태웅에게 스윽, 외투처럼 감겨들었다. 한 손으로는 서태웅의 한쪽 어깨를 감싸며, 다른 한 손으로는 서태웅의 손등을 꼬옥 쥐었다. 뭐야 손이 왜 저렇게 커. 아 맞다 농구선수랬지. 눈썹을 사고 친 강아지처럼 치뜨면서 서태웅의 어깨 너머로 우는소리를 한다.
“나도 먹고 싶었어. 아니 지금도 먹고 싶어.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와. 세 여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동시에 마주쳤다. 여자들만 아는 눈빛을 주고받는다. 2m는 되어 보이는 남자의 강력한 애교. 엄청나다. 이런 건 처음 본다. 친구 한 명이 무슨 소주 마시듯 급하게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샷했다. 나도 갑자기 카페인이 확 땡겼다. 정신을 차리고 싶다. 저 남자들이 계산대에서 물러가면 추가로 시켜야지.
서태웅 선수는 윤대협 선수의 얼굴 공격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속눈썹이 이렇게 멀리서 봐도 무지 길었다. 미친. 남자 농구선수가 마스카라를 쓰나? 그럴 리가 없는데. 탁, 쳐내듯이 자기 손을 붙든 윤대협 선수의 손을 떨쳐내고, 억양 없는 목소리로 주문을 한다.
“몽블랑 6개랑 아메리카노 아이스 한 잔, 따뜻한 거 한 잔이요.”
그래도 어깨를 감싼 윤대협 선수의 팔까지는 쳐내지 않았다. 보통 반대 아닌가? 뭐지? 화가 풀린 건가? 서태웅 선수의 손목을 잡고 두리번두리번 앉을 자리를 찾는 윤대협 선수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쟤네 대체 뭐냐...
나는 재빨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더 주문했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같은 선택을 했다. 순식간에 테이블에 아메리카노 세 잔이 추가됐다. 아무도 디저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지금 달달한 걸 더 먹으면 당 쇼크로 죽는다.
두 미남 농구선수는 몽블랑 세 개를 앉은 자리에서 오물오물 깨끗하게 싹 비웠다. 서태웅 선수는 살벌하게 노려볼 때는 언제고 포크 옆면으로 잔뜩 뭉개 놓은 몽블랑(이었던 것)을 윤대협 선수의 커다랗게 아앙 벌린 입 속에 쏙쏙 넣어주었다. 염병 그 자체였다.
당연히 윤대협 선수도 서태웅 선수에게 완벽하게 모양을 유지한 밤 크림, 샹티 크림, 아몬드 크림, 타르트지, 밤 조림 조각을 포크에 얹어 떠먹여 주었다. 그런데 입이 너무 작아서 입술 주변에 크림이 다 묻었다. 윤대협 선수는 좌우만 빠르게 두리번거리더니 (뒤에 있는 우리는 너무 조용해서 존재를 잊어버린 것일까) 재빨리 얼굴을 기울였다. 그의 뒤통수가 치워지고 나자 다시 무표정한 서태웅 선수의 얼굴이 드러났다. 크림은 없어졌고 이상하게 뺨이 벌게져 있었다. 닦아 준 걸까? 근데 왜 손이 아니라 얼굴이 가?
그들이 몽블랑 여섯 조각을 30분 만에 다 조지고 아메리카노도 쪽쪽 빨아먹고 염병 천병을 떨다가 맛있다면서 몽블랑 네 조각을 더 포장해서 쇼케이스를 텅텅 비우고 떠날 때까지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난 조용히 트위터를 켰다.
나 방금 블루이글스 윤대협과 레드 드래곤즈 서태웅 몽블랑 3개씩 흡입하는 거 라이브로 봤다 농구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이번 시즌부터 보려고요 왜 이렇게 잘생긴 남자들이 반바지 입고 나오는 실내 스포츠가 있다고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지?????
마주 앉은 윤대협의 뒷모습과 서태웅의 앞모습이 찍힌 사진과 함께 그 트윗은 미친 듯이 바이럴을 탔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앙숙이자 라이벌로 유명했다. 난 믿지 않았다. 인용알티러들이 나를 속이는 게 분명했다. 세상에 어느 앙숙이... 말을 말자. 안구를 공유해 줄 수도 없고.
누군가 사진을 확대한 뒤 캡처해서 인용했다.
이거 서태웅 지금 웃는 거냐 설마?
그러고 보니 희미하게 웃는 것 같다. 왜? 그게 놀랄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