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ver Faded
불면의이쑤신
온점 님 <시간의 탁본> 축전센도 아키라는 부모님이 추천한 이사 업체의 견적서를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싹싹한 직원이 현관 앞에 빳빳하게 접힌 골판지 상자와 커다란 보자기를 잔뜩 내려놓았다. 더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센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을 것 같아요.
짐 정리는 언제고 그렇게 내키는 일은 아니다. 센도의 마음은 여유로웠다. 아무런 조바심 없이 늑장을 부렸다. 졸업은 3월 1일. 입학은 4월 1일. 그사이 한 달은 처음 만난 보너스 스테이지 같았다. 이제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아직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붕 뜬 느낌. 센도에겐 잘 맞았다. 인생에 좀 더 이런 기간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얼 하면 뜬 사람답게 보낼 수 있을까? 연달아 다가오는 하루를 아무 계획 없이 보내는 건 중독성이 있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내키면 벌떡 일어나 씻고 머리하고 옷 입고. 봄이 다정하게 데워 준 바닷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모든 것이 적당했다.
마지막인지 처음인지 잘 알 수 없는 봄 방학 만끽하기. 그게 이사 준비를 무책임하게 미룰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핑계는 아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죄다 정리해 버리면 뭘 입고 뭘 먹고 어떻게 씻으란 말인지. 부지런히 정리해 버린 골판지 박스를 뒤져가며 며칠씩 생활하긴 싫었다. 귀찮음을 참고 움직인 탓에 더욱 귀찮아지는 건 사양이다.
물욕이 많은 편은 아니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오래 걸리지 않을 줄 알았다. 이사 전날. 저녁을 먹고 나서야 센도는 박스를 접기 시작했다. 그래도 자기 전에 끝나리라 짐작했다.
완전히 오산이었다. 3년간 매일 낮 매일 밤. 하루도 빼먹을 수 없는 일상이 가진 퇴적의 힘을 얕봤다. 자정이 됐을 때 센도는 겨우 버려야 할 것들을 다 버린 상태였다. 100L 쓰레기봉투를 꽉 채웠다. 언젠가 쓰겠지 싶어 처박아 둔 잡동사니, 유통기한이 지난 헤어왁스,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 다시는 들춰볼 일 없을 교과서 같은 것이 끝도 없었다.
센도는 냉정하게 남은 체력과 확보할 수 있는 수면시간, 이사 업체와 부모님이 도착하는 시간을 계산했다. 최종적으로 지금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자는 결론을 내렸다. 난장판인 집안에서 유일하게 언제나처럼 깨끗한 침대 위에 신속하게 드러눕는다.
카나가와에서의 마지막 밤. 여운에 젖을 새도 없었다.
센도는 늦잠을 자지 않았다. 깔끔한 6시간의 숙면. 아직은 쌀쌀한 3월의 밤 기온이 더위를 많이 타는 센도에겐 딱 좋아서 그런지. 개운한 기분으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앞머리를 매만진다. 아마 지금부터 이사 업체와 부모님이 도착할 때까지 빠듯하게 움직여야 할 테니까.
센도는 존 디펜스를 결정했다. 그러니까 구역별로 짐을 챙기기로 했다. 먼저 화장실. 이 집에서 가장 좁은 곳인데도 어제 쓰레기를 가장 많이 배출한 장소다. 덕분에 챙길 건 몇 없었다. 소모품은 다시 사면 그만이니까. 다음은 부엌. 역시 단출하다. 센도는 살뜰히 요리하는 편은 아니었고 손님을 자주 부르지도 않았기에 한 사람 몫의 식기가 전부였다. 식재료는 챙겨 갈 정도로 남진 않아 어제 음식물 쓰레기로 전부 처리했다. 전자레인지와 냉장고는 이사 업체가 챙기겠지.
남은 건 옷이다. 생각보다 많았다. 옷장을 그대로 털어 넣는 느낌으로 박스 여럿을 꽉 채웠다. 테이프를 길게 뜯어 이로 끊는다. 가위는 귀찮다. 뚜껑 쪽에 크게 썼다. 옷. 가방. 침구. 책. 주로 농구 잡지지만. 과월호인데 왠지 버리기가 싫었다.
마지막으로 정리한 건 농구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왠지 따로 챙겨야 할 것 같았다. 다시 입을 일 없는 고등학교 농구부 유니폼은 옷이라고 적은 박스보다 추억이라고 적은 박스가 맞을 테니까. 조금 간지럽더라도. 료난의 저지. 티셔츠. 유니폼. 트로피. 대학에 가도 계속 쓸 물건도 그냥 넣었다. 농구공. 아대. 스포츠 삭스. 테이프. 압박 붕대.
료난 고등학교 센도 아키라의 거의 모든 것이 박스 안에 들어갔을 때. 무심코 올려다본 침대 위 벽에 걸려있는 것 때문에 센도는 작게 탄식했다.
잊고 있었다. 마이클 조던 포스터.
자신이 붙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넓은 방바닥을 놔두고 꼭 침대 위에서 배를 깔고 농구 잡지를 탐독하던 그 녀석. 어느 날 NBA 선수들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다가. 센도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누구인지 물었고. 이런저런 선수들이 가진 각자의 개성과 매력에 대해 잔뜩 얘기했는데도.
다음 날 그 녀석이 가져온 건 결국 마이클 조던 포스터였다. 어차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걸 가져올 거면서.
한 손으로 쥐고 온 두툼한 지관통. 제법 큰 A2 사이즈 포스터가 돌돌 말린 채 튀어나왔다. 주머니에서 꺼낸 은색 클립 네 개. 오셀로 말처럼 까맣고 동글납작한 자석 네 개. 뒷면마다 양면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그 녀석은 웃음이 날 정도로 진지한 태도로 포스터 네 귀퉁이에 정중하게 클립을 끼웠다. 햇볕이 가장 잘 드는 벽을 골라 몇 번이고 상체를 뒤로 빼어 수평을 맞춰가며 자석을 붙였다. 클립을 끼워 둔 포스터의 네 귀퉁이가 자석에 맞춘 듯이 달라붙었다. 센도는 자신도 모르게 경탄의 휘파람을 불었다.
그 녀석은 포스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어설프게 뒷걸음질 쳤다. 반대쪽 벽에 기대앉아 있던 센도의 곁에 설 때까지. 팔짱을 끼고 자신의 역작을 감상했다. 흘끗 쳐다본 옆모습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꽤 만족한 것 같다고. 왠지 알 수 있었다.
잘 됐구나. 고맙다기보다 센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센도는 벽에 무언가를 붙여 놓는 취향은 없었다. 타인의 침범을 내버려 두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때의 센도는 잘 됐다고.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 다정하고 서툰 구석이 있는 침범이었다.
센도는 침대 위에 발을 딛고 올라서서 포스터 맨 위 귀퉁이로 손을 뻗었다. 그때 그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클립에 닿은 자석 표면이 살짝 녹아 끈적해져 있었다. 그래도 쉽게 떨어졌다.
햇살에 빛바랜 벽지 한가운데가 A2 사이즈만큼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멋대로 붙이고 간 마이클 조던 포스터의 크기만큼.
센도는 어설프게 뒷걸음질 쳤다. 반대편 벽에 등이 닿을 때까지.
한참 동안 영원이 새겨진 자국을 바라보았다.
초인종이 울리고 모든 것이 도쿄로 떠날 때까지. 필요가 남은 사물들과 함께 센도 역시 떠나도. 모르는 이가 다시 벽을 도배해도. 이 벽지에 새겨진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곁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