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Dive
불면의이쑤신
농꺼풀 님 <High Tide> 축전솔직히 인정하자. 윤대협은 최근 들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농구부원들이 눈치 챌 정도였나 보다. ‘주장이 코트 위를 걷지 않고 날라다닌다’, ‘컨디션이 왜 저렇게 좋냐’, ‘보약 좋은 거 먹기 시작했으면 공유 좀.’ 윤대협이 보기엔 다소 과장된 후기가 쏟아졌다. 유명호 감독님은 저게 드디어 철들어서 전국 우승을 진지하게 마음먹은 모양이라며 감격하셨다. 아니 난 언제나 진지했는데...
윤대협은 머쓱해졌다. 딱히 겉으로 티 낼 생각은 아니었다. 연애를 시작했다는 걸. 그것도 아무도 상상 못 할 사람과.
애인이 농구를 너무 좋아하니 농구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연애와 농구는 선순환의 상관관계였다. 서태웅을 생각하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액순환이 빨라지고, 온몸이 뜨끈해졌다. 웜업이 필요 없다. 몸이 가벼울 수밖에.
특히 좋아한다고 말하던 얼굴을 떠올리면 천하무적이 된 기분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듣도 보도 못한 슈퍼플레이도, 불가능해 보이는 패스도, 완벽하지 않은 팀의 약점을 혼자 메꾸는 일도.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시작이 두려웠던 게 거짓말 같다. 윤대협은 가장 먼저 체육관에 나타나서 가장 먼저 사라졌다. 서태웅 찾으러. 맨날 보는데 왜 자꾸 보고 싶은지 의문이다.
그건 윤대협이 생각보다 달달한 연애의 맛에 머리가 돌아버렸기 때문만은 아니고, 최근 서태웅의 미모가 물이 오른 탓도 있었다. 서태웅은...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하루가 다르게 예뻐졌다. 이목구비는 당연히 그대로인데, 언제나처럼 표정도 적은데, 희한하게 광채가 났다.
아마 집중하는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일 거라고 윤대협은 추측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나서 서태웅은 더 이상 윤대협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불순물이 하나도 없는 순수한 에너지가 윤대협의 정면으로 부딪쳐 온다. 열심히 말을 붙이면 한두 마디일지라도 꼬박꼬박 대답하면서, 의외로 기분이 좋아졌는지 살짝 입술 끝이 올라간다. 아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예뻐지는구나. 윤대협은 서태웅을 보고 알았다.
사귀기 전과 달라지지 않은 점이 있다. 서태웅은 여전히 스킨십에 약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 사심 없는 윤대협의 손길에도 소스라치곤 했으니. 머리를 쓰다듬거나, 등짝을 토닥이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웃거나, 굳이 목덜미의 땀을 닦아주는 일. 아무 사이도 아닐 때와 미묘하게 다른 강도, 움직임, 온도. 완전히 다른 의도.
서태웅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 애는 자각이 늦을 뿐 무감한 편은 아니다. 반대로 예민하다. 그게 뭔지 깨닫지를 못해서 그렇지. 윤대협은 그저 자신이 기분 나쁠 정도로 음흉한 얼굴만 아니길 바랐다.
두 사람은 여전히 일 대 일로 죽어라 농구하는 것 외에는 별로 연인다운 데이트 한번 한 적이 없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 윤대협은 사귀고 난 이후로는 꼬박꼬박 서태웅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언제나 자전거를 밀고 자신보다 두 발짝 뒤에서 걷는 서태웅의 옆에 나란히 섰다. 사실은 손을 잡고 걷고 싶었다.
그래서 집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는 반드시 서태웅의 오른손을 꼭 잡고 인사를 했다. 악수가 아니고, 남자가 여자를 에스코트할 때처럼, 서태웅의 손등이 보이는 정중하고 다정한 모양으로.
그러면 서태웅은 입술을 꾹 깨물고 목덜미를 붉히면서도 절대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단단하게 윤대협의 커다란 손을 마주 잡는다. 윤대협이 먼저 손을 놔 줄 때까지,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서 입을 한 일자로 꾹 다문 채 온몸으로 좋아한다고 외친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참기가 좀 어려웠다. 윤대협은 급기야 충동적으로 쪽! 하고 서태웅의 흰 손등에 입술까지 찍고 돌아섰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집을 향해 걸어가다가, 이쯤 되면 서태웅에게 보이지 않겠지 싶었을 때, 폭발할 것 같은 심장에 맞춰서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전력 질주를 해도 심장박동을 따라가긴 힘들었다.
다른 곳엔 어떨까. 이마나, 볼이나, 살짝 올라간 예쁜 코끝이나, 도톰한 입술이나... 그럴 때 서태웅의 얼굴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면 또 갑자기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구름 위를 걷는 것 같고 덩크슛이 쉬워졌다. 연애는 농구에 좋구나. 윤대협은 생각했다. 지금 이 두근거림이 너무 좋아서, 스킨십의 진도는 꼭 천천히 나가야겠다고.
오늘은 자전거 없으면 좋겠다. 손잡고 다니게. 휘파람을 불면서 윤대협은 북산까지 마중을 갔다. 북산 농구부는 능남과 달리 제대로 된 연습 스케줄이 없는지 한 번 꽂히면 늦게 끝나는 경향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윤대협 애인은 가장 늦게 나오는 편이어서, 연습이 겹치는 날엔 학교까지 데리러 가야 가장 빨리 만날 수 있었다.
조금 일찍 도착한 것 같다. 문 옆에 기대서 기다리기로 했다. 서태웅의 자전거는 보이지 않는다. 럭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태웅의 이름이다. 윤대협은 저절로 귀를 기울였다.
“태웅아, 그, 다른 게 아니고. 이게 사실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닌데.”
북산 주장이다.
“내가 보려고 본 게 아니고... 진짜 그냥 동네 지나가다가... 윤대협이 너한테 그... 손등에다가... 어... 크흠!”
이런. 들켰구나. 윤대협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주변을 더 살펴볼 걸 그랬다.
“아무튼... 거 사귀는 건 내 알 바 아닌데... 조심 좀 하고... 크흠. 어쨌든 무슨 일 생기면 얘기하고...”
“사귀는 거 아닌데요.”
“엥?”
엥? 윤대협은 송태섭과 동시에 반문하며 벌떡 몸을 일으켜 문을 마주 봤다. 내 귀가 이상한 게 아니라면 지금 그건 분명 태웅이 목소리...
“사귀는 거 아니라고요. 윤대협하고.”
윤대협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어...? 그... 그래? 근데 왜... 어?”
“앞으로 조심하겠슴다.”
“으응... 잘 가라...”
문이 열렸다. 서태웅이 서 있다. 아주 약간 표정이 밝아진다. 반가운 것이다.
“윤대협.”
안심한 듯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윤대협은 참을 수 없었다. 여기가 남의 학교인 것도 잊고 서태웅의 양 어깨를 두 손으로 턱 붙잡고 외쳤다.
“태웅아, 우리 사귀는 거 아니었어?”
탕! 탕, 탕탕탕... 저 뒤에서 송태섭이 농구공을 떨어뜨렸다. 길 가던 북산 학생들이 걸음을 멈춘다. 뭐야. 농구부 또 재미있는 거 한다. 쟤는 다른 학교 교복 아니야?
서태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사귀자고 안 했는데?”
윤대협은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말이 꼬인다.
“아니, 너...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나도 너를 좋아하고. 그런데 왜...”
“아직 사귀자고 안 했잖아.”
서태웅이 똑같은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자신의 어깨를 꼭 붙잡은 윤대협의 커다란 손을 잠깐 내려다보더니, 박력 있게 팔뚝을 턱 맞잡는다.
“윤대협.”
까만 눈동자가 전심전력으로 번뜩이며 부딪혀온다.
“나랑 사귈 거야?”
오늘은 어제보다 더 예쁜 얼굴로.
“...네...”
윤대협은 왠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얼굴이 터질 것 같다. 어느새 주변에서 구경하던 북산 학생들이 와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서태웅은 흥, 하고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더니 힘이 풀린 윤대협의 손목을 잡아당겨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한 윤대협은 끌려가듯 비틀비틀 따라갔다.
앞서가는 서태웅의 목덜미가 벌겋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윤대협의 가슴 속에 따질 곳 없는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다. 이 자식은 고백까지 주고 받고도 사귀는 줄 몰랐다니. 그럼 넌 나랑 아직 사귀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그렇게 만지고 손잡고 뽀뽀해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얼굴만 붉히고...
에잇. 윤대협은 충동적으로 서태웅의 어깨를 감싸며 달라붙었다.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는 서태웅의 입술 정중앙에 쪽! 입 맞추고도 도망가지 않았다. 그냥 둘 다 빨개진 채로 항상 농구하던 곳까지 말없이 걸었다.
오늘부터 1일인 기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