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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2024.02.24

체크메이트가 없어도 멸망하는 세계

불면의이쑤신

스리코 님 <천장지구> 축전

마호가니 테이블은 묵직한 체스판에 점령당했다. 커피잔 두 개 놓일 공간도 아슬아슬하다. 체리목과 상아로 엮은 매끄러운 흑백 정사각 구획 위로 차가운 돌로 된 체스 말이 늘어섰다.

윤대협은 비숍 하나를 폰의 벽 너머로 전진시켰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는 룰을 모르는 게임에서도 늘 경계를 넘는다.

서태웅은 망설임 없이 같은 말을 거울처럼 놓는다. 그는 승부가 아니어도 윤대협을 상대할 땐 버릇처럼 맞불을 놓았다.

벨벳을 덧댄 바닥이 상아를 때리는 은근한 소리와 함께 말들이 거침없이 전진하고, 꺾어지고, 아무 곳에 자리한다. 폰, 룩, 나이트, 퀸, 심지어 킹까지. 의미 없이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모든 진영의 원자적인 특이성. 결코 집합이 될 수 없는 독립된 세계가 1초마다 탄생하고, 영원히 사라진다.

한 번 이동할 때마다.

“내가 여자여도.”

하나의 우주.

“네가 여자여도.”

윤대협의 가정법에 서태웅은 대답하지 않는다. 묵묵히 내키는 말을 무작위로 옮긴다. 방금 전까지의 세계 속의 사랑도 가차 없는 멸망으로 긍정된다.

“너만 남자여도.”

“난 원래 남자야. 멍청아.”

처음으로 음성이 대꾸한다. 윤대협이 늦여름의 바람처럼 웃었다. 기꺼이 다음 세계를 시작한다. 순서는 우연이다. 흑이 주어졌다고 해서 힘도 권력도 유불리도 없다. 누가 닭인지, 누가 달걀인지, 누가 물었는지, 누가 답했는지. 중요치 않다.

“내가 외계인이어도.”

끝없이 변화하는 무한대의 경우의 수에.

“네가 외국인이어도.”

하나가 늘어나고.

“동물이라도.”

또 하나가 늘어난다.

윤대협이 반대편 끝까지 도착해있던 폰을 하나 붙든 채 잠시 상념에 잠긴다. 묵묵한 속눈썹 끝에서 불안을 읽어도 서태웅은 재촉하지 않는다.

하얗고 긴 손가락 끝에 걸려 있던 새까만 흑요석 폰이 체스판 바깥, 마호가니 테이블 위 유리에 내려갔다. 달그락, 모서리를 부딪는 소리가 난다. 윤대협의 손이 조금 떨렸기 때문이다.

“네가 없으면...”

윤대협의 목소리는 조금 더 떨렸다.

“혹은 내가 없으면.”

처음으로 던져진 진정 답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서태웅은 존재를 하나 잃은 체스판을 내려다본다. 홀로 사각형의 우주를 벗어난 검은 폰. 자유를 느끼진 못했다. 어쩐지 외로워 보였다.

서태웅은 마음을 정했다.

기다란 검지손가락 두 개를 뻗는다. 하나는 화이트 킹, 다른 하나는 블랙 킹의 왕관 가운데 정수리를 정확히 짚는다.

따닥! 돌과 상아가 부딪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왕이 동시에 쓰러졌다.

윤대협은 멍해졌다. 음파가 공기 중에 산산이 흩어지며 여운을 남긴다. 서태웅의 선택을 이해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침묵 속에서 윤대협은 빙그레 웃었다.

영원한 결말. 기권 또는 몰수 게임. 무사히 선사된 우직한 무의미. 서태웅도 패배를 선택할 수 있다니. 그것도 나와 함께. 처음부터 게임도 승부도 아니었는데...

미소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윤대협은 소리 내어 웃었다. 눈꼬리를 물기가 서릴 정도로 활짝 접었다. 서태웅도 소리 없이 웃었다. 침묵보다 가만한 미소가 동시에 쓰러진 킹 두 개가 잃어버린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최고의 사랑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