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불면의이쑤신
아양 님 <어디에서나 언제까지나> 축전서태웅이 웃으면 어떨까.
지독하게 미소가 비싼 미남자의 인생을 숙명처럼 따라다닌 가정법. 어차피 꿈꾸는 김에 아예 과감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이들도 있었다. 모 NBA 선수가 고등학교 때 시합 중에 분명히 봤다고 우기는 찰나의 미소나, 농구팬들이 나노 단위로 프레임 쪼개서 입꼬리 각도 분석하는 그런 신기루 같은 미소 말고, 생글생글 방긋방긋 버릇처럼 잘 웃는 서태웅은 어떨까. 그래, 마치 윤대협처럼...
허무한 망상이었다. 서태웅 사진을 AI로 움직여서 강제로 웃겨야 대충 감이라도 잡을 수 있는 몽유도원도였다.
윤대협과 서태웅이 결혼해서 윤가을을 낳기 전까진.
“다녀왔습니다.”
“아빠! 아빠가 일본 여행 사진, 뽑아 왔어! 같이 봐!”
퇴근하는 서태웅을 마중 나온 윤가을이 종아리에 매달려 외친다. 샤워실 속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뭐라 뭐라 울리는 걸 보니 윤대협은 씻고 있는가 보다. 서태웅은 윤가을을 번쩍 안고 소파로 갔다. 거실의 로우 테이블 위에 인화 사진이 가지런히 쌓여있었다.
윤대협은 디지털 사진을 꼭 인화해 온다. 서태웅과 살면서 시작된 습관이다. 윤대협은 사진이 액정 화면 속의 픽셀이 되면서, 더 이상 손에 쥘 수 없게 된 이후, 더 빨리 사라지고 손쉽게 분실되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우린 친가에 가면 어린 시절 앨범이 있잖아. 심지어 부모님 어릴 적 사진도. 그런데 고작 몇 년 전 사진은 찾기 힘들어. 핸드폰 바꾸거나 유행하던 SNS 앱이 없어지면 끝장이야.”
그래서 몇십 년 뒤까지 간직하고 싶은 사진은 반드시 인화하겠다고 윤대협은 선언했다. 다짐대로 엄선하여 뽑아 오는 사진들, 지문이 남을 만큼 매끄러운 유광지에 찍힌 풍경은 언제나 서태웅과 윤가을의 얼굴이었다.
일본 여행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윤가을은 어느 사진에서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서태웅과 똑같은 이목구비로 윤대협처럼 거리낌 없이 웃는다. 딸을 무릎에 앉히고 함께 사진을 보며 서태웅은 떠올렸다. 교토 거리를 걸으며 세 걸음에 한 번씩 살인미소를 발사하던 순간을. 다양한 국적의 행인들이 한 번씩 뒤돌아봤다. 예쁜 골목에서 제법 귀여운 포즈로 사진을 찍으면 한국인 관광객들이 모델인가 봐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아닌데.
모두 윤가을을 보면 서태웅을 축소한 것 같다고 말한다. 정작 서태웅은 딸의 얼굴에서 완벽한 윤대협을 보았다. 햇살처럼 다정하게 웃을 때마다.
윤대협과 똑같은 각도로 휘어진 눈웃음이 서태웅에게 묻는다.
“아빠, 여행 재미있었지.”
“응.”
“비행기 처음 타 봐서 좋았지?”
“처음 아닌데.”
윤가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왜?”
“처음이 아니니까.”
“언제 탔어? 어디 갔어?”
“예전에. 어디 어디 갔더라. 하와이랑 LA랑...”
기억을 더듬던 서태웅이 흠칫 멈췄다. 딸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왜 가을이는 같이 안 갔어...?”
진정으로 충격을 받은 팔자 눈썹. 이럴 때도 윤대협과 똑같다. 서태웅은 침착하게 답변했다.
“가을이는 태어나기 전이었어. 아빠들이 신혼여행 간 거야.”
무릎 위의 햇살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섯 살에게는 조금 어려웠을까.
“가을이는 없었어. 그래서 같이 못 갔어.”
윤가을이 묵묵히 생각에 잠긴다. 이럴 때는 거울을 보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울먹일 것 같던 물기가 얼굴에서 싹 사라졌다. 애들은 기분 전환이 빠르다. 서태웅은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윤가을은 서태웅의 손에 들린 사진을 한 장씩 넘긴다. 세 장쯤 넘겼을 때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이 나왔다. 청수사 앞에서 윤대협과 윤가을이 환히 웃고 있다. 서태웅은... 웃는 얼굴로 찍힌 사진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태웅은 안다. 그 순간 얼마나 행복했는지.
행복한 서태웅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윤가을이 말했다.
“쓸쓸했어?”
“응?”
서태웅이 윤가을의 조그마한 얼굴에 귀를 갖다 댔다. 잘 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윤가을은 서태웅을 마주 보며 또박또박 다시 말해주었다.
“가을이가 없어서, 쓸쓸했어?”
이번에는 서태웅의 눈이 커졌다.
똑같이 생긴 눈매가 서로를 바라본다. 잠시간의 고요한 응시.
서태웅의 표정이 부드럽게 녹았다.
“응. 쓸쓸했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따사로운 미소였다.
“그때는 잘 몰랐어. 가을이가 없어서 쓸쓸한지.”
서태웅의 커다란 손이 윤가을의 숱 많은 머릿결을 쓰다듬는다.
“이번에 같이 여행 가 보고 알았어. 가을이가 없는 여행은 쓸쓸했었어.”
“그랬구나.”
윤가을이 사려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태웅을 꼭 끌어안고 속삭인다.
“앞으로는 내가 꼭 같이 가 줄게. 약속!”
서태웅은 윤가을을 꼭 끌어안고 말했다.
“고마워.”
우리한테 와 줘서, 내 가족이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
아빠와 딸의 단단한 포옹 위로 두터운 팔 한 쌍이 한 겹 더 힘주어 겹쳐진다. 샤워를 마치고 얼른 끼어든 윤대협이었다. 머리카락에서 아직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윤가을이 타박했다.
“차가워!”
“하하, 미안 미안. 나 빼고 무슨 얘기 했어?”
“비밀이야~”
윤대협은 아방하게 서태웅을 쳐다본다. 그 얼굴이 제법 바보 같아서 서태웅은 후 웃었다. 윤대협이 아주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지구상의 누구보다도 윤대협이 가장 많이 목격한 흔치 않은 광경. 배타적으로 독점한 미소.
세 가족은 똑같은 얼굴로 동시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