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ing Memory
불면의이쑤신
농꺼풀 님 <Cross Section> 축전북산 고등학교는 하교 시간을 엄격하게 단속할 정도로 기강 잡힌 교풍이 아니다. 모두 집으로 돌아갈 시간. 하늘은 붉어졌다가 다시 파랗게 가라앉고 저녁별이 은은하게 빛난다. 교내는 고요하다. 체육관만 빼고.
서태웅은 규칙적인 드리블 소리로 정적을 깨부순다.
농구는 감각에 가깝다. 물론 팀 스포츠는 어디까지나 전쟁이므로 시합에선 큰 흐름을 읽는 것도 작은 전략을 통제하는 것도 필수적이고 각자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마련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장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이성보다는 본능의 영역이다. 대체로 감각 단계에서 직접 행동이 된다. 의식이 끼어들어 ‘자, 이렇게 해’라고 말할 틈이 없다. 뭔가를 느끼는 즉시 반응한다. 틈이 보이기 전에 이미 돌파한다. 그런 콤마 1초가 모여서 40분이 된다.
그래서 좋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시간. 나와 나의 감각만 남는다. 최대치가 되었을 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이전과는 다른 움직임을 뚫어내 득점한다.
농구 말고도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다.
서태웅은 무언가를 잘라내려는 듯이 다급하게 점프슛을 던졌다. 손을 떠난 농구공은 허무한 소리를 내면서 림을 맞고 굴러가 버린다. 젠장.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감각을 알아버렸다.
그건 시도 때도 없이 서태웅을 마비시킨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장소에 스턴건을 댄 것처럼. 불시에 배꼽 안쪽이 꿈틀거린다. 입천장 깊은 곳이 발작처럼 가렵다. 몸통의 가장 아래쪽이 화끈거린다.
윤대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이상하다. 머릿속의 이미지는 아주 익숙하고 담백하며 흔하다. 웃는 얼굴. 웃지 않는 얼굴. 빼곡하게 올려붙인 앞머리와 이마의 경계선. 쓸데없는 제스처를 하는 법 없는 기다란 손가락.
그런데 몸은 다른 것을 기억한다. 휘어지는 속눈썹 끝에 맺혔던 땀방울. 웃지 않는 입술이 뿜어내던 더운 김. 다 내려와 헝클어진 앞머리 끝이 닿았던 모든 장소. 그리고 손가락...
서태웅은 발을 구르듯이 쿵쾅거리며 아까 굴러갔던 농구공을 향해 돌진한다. 부모의 원수처럼 두들겨서 드리블로 살려내어 반대편 골대까지 뛴다. 시원하게 덩크를 꽂고 철썩이는 네트 소리를 들으니 약간 진정이 된다. 잡생각도 림 속으로 던져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나마 농구할 때가 제일 생각이 덜 난다. 혼자 있는 시간이 제일 안 된다. 특히 해가 지고 별이 뜰 때. 방심하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 시작할 때. 그때가 가장 위험하다. 서태웅은 농구를 하지 않으면 혼자 졸고 있는 사람인데.
그러니까 농구를 안 하면 대충 윤대협 생각을 한다는 소리다.
옆얼굴을 점령한 땀방울을 반소매에 신경질적으로 부비며 서태웅은 실수를 인정하기로 했다. ‘다음 단계’라는 관용적 표현에 속았다. 서태웅이 윤대협에게 섹스를 하자고 한 건 연인 사이에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 숙제를 해치우거나 낙제를 피하거나 한 수 위였던 상대를 돌파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거쳐야 할 단계라고만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이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농구 정도로...
신체 안팎의 열이 식지 않는다. 농구 때문만은 아니다. 왜 미성년이나 학생들에게 섹스를 금기시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서태웅은 생각한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자극이 너무 강해서. 금방 모든 것을 휩쓸어 가 버려서. 어른들은 이런 것을 일상생활과 병행한단 말인가. 굉장하다.
크게 한숨 한 번 쉬고 서태웅은 집에 가기로 했다. 체육관 불 끄고 자전거 핸들을 잡는다. 식어버린 공기 속을 가르며 페달을 밟다가. 어느 갈림길에서 충동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무의미한 저항을 포기하고 감각이 이끄는 대로 향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