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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4

윤대협과 서태웅은 서로를 사랑해

불면의이쑤신

또웅 님 <일짱 흑표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내가 고슴도치?> 축전

“무조건 ‘서’ 들어가야 해. 아니면 안 돼.”

까망이라고만 부르던 아기의 정식 이름을 이제는 진짜로 정해야 할 때가 왔을 때, 윤대협은 곧 죽어도 그렇게 고집을 부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성이 윤씨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누구 성을 따를 건지를 두고 한 끗발 날리는 양가의 신경전이 없었다곤 말할 수 없으나, 다른 누구도 아닌 서태웅의 윤대협 미니미에 대한 강한 집착 덕분에, 드러나는 분쟁 없이 까망이는 윤가(家)가 됐다.

순순히 따라주는 듯했던 윤대협은 마지막 순간에 딱 하나의 조건을 내밀었다. 반반씩 만든 아기니까 서태웅 이름도 들어가야 한다고. 어떻게든. 그래서 어린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고민했다. ‘서’로 시작하는 예쁜 이름... ‘서’로 시작하는 예쁜 이름... 어라?

서태웅이 윤대협의 팔뚝을 덥석 붙잡고 말했다.

“윤서로.”

“응?”

“윤서로.”

우리 서로 사랑해서 만든 아기니까.

그날 서태웅은 산모 수첩 맨 첫 장에 이렇게 적었다.

새까만 흑표 한 마리가 제 털만큼 까만 유모차에 머리부터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앞발까지가 한계다. 허리부터 하반신은 죽 튀어나왔다. 발톱을 채 못 감춘 커다란 뒷발이 시트를 죽죽 긁었다.

저거 또 유모차 걸레짝 만드네. 한숨을 쉬고 혼현의 모습으로 아이를 말리러 다가가던 서태웅은 초조하게 홱홱 공기를 가르던 제법 굵어진 꼬리에 얻어맞고 제법 멀리까지 나가떨어졌다.

그르르르릉! 집 천장까지 흔들릴 듯한 무시무시한 진동이 울렸다. 윤대협이었다. 방금까진 사람이었는데 순식간에 혼현을 꺼냈다.

5m짜리 주택 층고가 더 이상 높아 보이지 않는 거대한 흑표의 경고에 아기 흑표는 깜짝 놀랐다. 허둥지둥거리다가 유모차에서 질질 내려온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만 위로 치뜬 가엾은 표정으로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나동그라져 있는 엄마 고양이에게 기어갔다. 윤대협은 어이가 없었다. 나왔다, 윤서로 특기. 악어의 눈물. 불쌍한 척하기.

사고 친 윤서로가 하늘을 향해 드러난 서태웅의 보드라운 가슴털에 큼지막한 콧잔등을 부비면서 꺅, 꺅, 표범 특유의 새소리를 낸다. 이거 또 우는소리로 넘어가려고.

대체 누구한테 이런 걸 배웠지. 아무래도 이 집안의 첫 번째 흑표인 윤대협이 수상하다. 괜스레 째려보면 어느새 윤대협은 다시 사람으로 변해서 걱정스럽게 이쪽을 보고 있다. 서태웅은 한숨을 쉬었다. 하긴 쟤는 우는소리를 너무 못해서 탈이었는데. 얜 우는소리를 너무 잘해서 탈이고.

하여간에 극단적인 흑표들. 역시 이 집안은 나 없이는 안 되겠어. 서태웅은 씩씩하게 앞다리로 아기 흑표의 주둥이를 부여잡고 콧잔등을 싹싹 그루밍하기 시작했다.

윤서로 30개월. 더럽게 말 안 듣는다.

태어날 때는 사람의 모습이었던 수인들은 만 3세까지의 혼현기 동안에는 동물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이때 혼현으로서의 성장이 거의 완성된다. 마치 야생동물들도 태어나서 6개월에서 1년 정도면 몸의 성장이 끝나는 것처럼.

한 살까지는 그럭저럭 귀여운 사이즈였던 윤서로는 두 살을 넘어가며 흑표치고도 거대한 윤대협의 거의 절반 수준에 이르렀다. 서태웅은 한 입 거리 된 지 오래다. 어디까지나 혼현으로는 그렇다. 혼현기가 끝나면 작은 어린이가 되어 빵 덩어리처럼 서태웅에게 달랑 들리겠지만. 아직 6개월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점점 더 아기 흑표 통제에 물리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서태웅은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윤서로가 넝마 떼기로 만든 까만 유모차는 그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됐다. 실은 소중한 가문의 보물이기 때문이다. 무려 윤대협과 서태웅의 결혼식에서 서태웅이 타고 입장했던 것인데. 어디 외출만 나갈라치면 저 몸집만 커다란 아기 흑표가 지 꺼 놔두고 엄마 냄새 나는 붕붕이가 좋다면서 대가리부터 들이밀고 보는 것이다. 당연히 반도 안 들어간다. 그래도 윤서로는 포기를 몰랐다. 서태웅은 윤대협 닮아서 떼쟁이라고 생각했고, 윤대협은 서태웅 닮아서 고집쟁이라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 윤대협과 서태웅은 어깨 한 번 으쓱하고 가문의 보물을 윤서로의 뒷발 스크래쳐로 바치고 말았다. 이 집안 보물 서열 1위는 윤서로이기 때문에.

엄한 아빠일 줄 알았던 윤대협은 의외로 윤서로에게 약했다. 웬만하면 하고 싶다는 대로 다 해줬다. 위험한 장난만 아니면 큰 소리로 혼내는 일도 거의 없었다. 타고난 기질이 짓궂은 윤서로는 엄마 아빠의 반응이 궁금해서 두 살 전후로 일부러 더 위험한 장난을 치는 시기가 있었는데 윤대협의 단호한 훈육에 그런 버릇이 쑥 들어갔다. 고의성이 있기 때문에 윤대협도 그때는 봐주지 않았다. 그런 때조차 엄격할 뿐이지 딱히 감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런 윤대협이 유일하게 화를 참지 못하는 순간이 아까 같은 때다. 갑자기 몸이 커진 윤서로는 팔다리와 꼬리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루에 꼭 한 번은 아기 교육한다고 조그마한 혼현이 되어 있는 서태웅을 퍽 소리 나게 가격했다.

그때마다 윤대협은 거의 본능적으로 위협부터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니 새끼인데. 서태웅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윤대협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윤대협은 윤서로한테 약했지만, 서태웅한테 훨씬 더 약했다. 약한 것을 보호하려는 본능은 윤대협이나 서태웅이나 똑같았다.

그래 놓고 윤대협은 윤서로한테 화내고 나면 본인이 더 당황했다. 뻘쭘하게 앞발 모으고 주눅 들어서 앉아있었다. 윤대협이 자기 자신에게 충격 받고 있는 동안 잉잉대는 윤서로는 서태웅이 달래줬다. 다행히 윤서로는 뒤끝이 없는 아기라 엄마 품에 코 부비면서 잘못했어요 웅앵거리고 나면 금방 잊어버렸다. 윤대협도 스윽 가서 윤서로의 뒷덜미를 쓱 핥아주면 화해 완료였다.

사실 윤대협은 혼현의 크기 차이를 생각할 때 서태웅이 윤서로를 훈육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아니 윤대협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수인이 그렇게 생각했다.

소용없었다. 세상에 단 한 사람, 서태웅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 거기서 얘기 끝.

종이 달라 말도 안 통하는 주제에 서태웅이 냥냥 캬아악 꼬리 팡팡 치면서 오늘도 사고 친 윤서로를 열심히 훈육하고 있으면, 윤대협은 가만히 서태웅 뒤에 앉아 있었다. 서태웅은 그냥 제 사이즈가 워낙 초라하니 윤대협이 뒤에서 부모의 위엄을 보태주고 있나 보다 했다.

지원 사격이긴 하지. 그러나 윤대협은 서태웅의 생각과 달리 병풍보다는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흑표끼리는 바디 랭귀지도 작은 울음소리도 눈을 감았다 뜨거나 찡그리는 의미까지 다 통한다. 주의집중력이 약한 윤서로의 시선이 엄마 얼굴만 피해 가는 걸 역으로 이용해, 윤대협은 서태웅의 뒤에서 윤서로에게 핵심적인 훈육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했다. 그건 위험하니까 다신 하지 마. 엄마나 아빠한테 먼저 말을 해. 어차피 그거 맛대가리도 없어. 윤서로는 비밀 메시지를 주고받는 듯한 세팅이 흥미로웠는지 제법 새겨듣고 긍정의 의미로 꼬리를 동그랗게 흔들곤 했다.

서태웅은 혼자서도 흑표 훈육을 마스터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 큰 흑표 한 마리를 뼛속까지 녹여서 본인 것으로 훈육해 놨으니까.

유모차와 사투를 벌이느라 피곤했는지, 서태웅 품 안에 코를 박은 윤서로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고양이의 보드라운 배털에 거대한 흑표의 이마빡이 퍽, 퍽, 박힐 때마다 서태웅이 전신을 움찔거렸다.

사람 모습으로 돌아온 윤대협이 불만스럽게 눈썹을 찡그렸다. 성격 같아서는 바로 떼어내고 싶지만, 아직 위험한 모습은 아니라 일단 참는다. 어차피 이제는 목덜미 들고 달랑 들어 올릴 수 있는 사이즈도 아니다.

몸이 커지고 나서는 전용 침대도 방도 마련해 줬건만. 응석쟁이 윤서로는 곧 죽어도 엄마랑 같이 자겠다고 매일 밤마다 떼를 썼다. 윤대협은 절대 반대였다. 그러다 서태웅이 깔리기라도 하면. 아이의 마음을 떠나 이건 반려의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하지만 서태웅은 이 집안 흑표들에게 마음이 너무 약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안절부절못하는 윤대협을 한 번 보고, 품속에 파고드는 아기 흑표를 한 번 본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 서태웅은 사람으로 변했다.

성체에 가까운 흑표 윤서로는 187cm 장정으로도 제법 버거운 사이즈였지만 적어도 깔려 죽을 걱정은 없었다. 털이 없는 매끈한 피부에서 곧바로 전해지는 체온을 제법 좋아하는 윤서로가 신이 나서 앞뒷발로 서태웅을 꼬옥 끌어안았다. 이번엔 발톱을 잘 감췄다. 윤대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까만 윤서로의 털가죽 사이로 드문드문 새하얀 서태웅의 살결이 보인다. 뜨끈한 아기 체온에 서태웅도 금방 눈이 가물가물해진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윤대협은 가만히 그걸 내려다보았다. 왼손으로 윤서로의 귀 사이를, 오른손으로 서태웅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둘 다 기분 좋게 기대온다.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소외되는 건 딱 질색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흑표가 돌아왔다. 꼬옥 붙어있는 아이와 엄마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앞발과 뒷발 사이에 품듯이 동그랗게 몸 전체를 대고 누웠다. 세 가족이 하나처럼 뭉쳤다.

윤대협은 커다란 혓바닥으로 서태웅의 관자놀이를 싹싹 핥았다. 윤서로는 서태웅이 안고 있으니 윤대협은 서태웅을 안고 있을 생각이었다. 서태웅은 눈을 찡그리고 도리질 쳤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앞에는 윤서로, 뒤에는 윤대협. 따끈하고 매끌매끌한 칠흑의 털에 둘러싸인 채로 서태웅은 가만히 심호흡했다. 천국의 침대에는 표범이 함께 누워 있을까.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꿀 같은 낮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