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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6.06.21

shape of love 4

불면의이쑤신

#any pain I can take

윤대협은 권준호와 통화를 하는 동시에 원격으로 차 문을 열었다.

"형. 태웅이네 집 주소 알아?" 아픈가 봐. 열 난다는데. 병원에서 항생제 좀 갖다 주려고. 그래. 고마워."

시동을 걸자마자 착실하게 메시지가 왔다. 윤대협은 그 주소를 그대로 네비게이션에 찍었다.

이윤과 작별하려는 순간에 전화가 왔다. 끊으려고 바라본 휴대폰 화면에 찍힌 이름.

서태웅.

잘못 본 줄 알았다.

집들이 이후로 윤대협은 서태웅에게 종종 연락했다. 결혼이 정리되기 전까지 만날 생각은 없었지만 아예 존재를 잊혀도 곤란하니까. 별 말은 안 했다. 밥 먹었냐든가 훈련 잘 하고 있냐든가 너네 선배 만났다든가. 마사지 받으러 한 번 오라든가. 전부 씹혔다. 메신저 잘 안 본다는 권준호의 정보에 따라 굳이 문자메시지로 보냈는데도. 마지막 건 좀 선 넘긴 했지.

당연히 서태웅이 윤대협에게 연락한 적은 없었다. 답장조차도.

혹시 모르니까. 서태웅의 전화를 받은 후에도 윤대협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선배..."

역시 잘못 온 전화였다.

푹 잠긴 목소리로 서태웅은 격렬한 기침과 함께 띄엄띄엄 말했다. 저 감기 같아요. 병원에... 못 갈 것 같아서. 혹시 해열제만 좀... 갖다 주시면... 안 될까요...

기침 때문에 거칠어진 숨소리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가 약했다. 윤대협의 심장박동이 흉곽 깊숙한 곳을 무게추처럼 때리기 시작한다. 비록 윤대협이 아니라 준호 선배를 찾고 있긴 하지만. 아마 비몽사몽에 잘못된 문자메시지로 콜백을 눌렀겠지.

어쨌든 윤대협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다.

들킬 것이 뻔하지만. 일단 선언해둔다.

"기다려. 바로 갈게."

긴 침묵.

휴대폰 너머에서 서태웅이 내뱉는 고르지 못한 호흡에 의문스러운 뉘앙스가 느껴졌고...

아 씨발...

욕설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윤대협은 미소를 참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범법을 피하는 과속과 거친 운전 끝에 윤대협은 병원에 도착했다. 권준호가 미리 준비해 둔 약을 챙겨 네비게이션의 원래 목적지로 향한다.

서태웅이 사는 주상복합 아파트는 허무할 정도로 병원과 가까웠다. 걸어가도 되겠다. 이래서 권준호한테 부탁한 거구나. 서태웅의 동호수를 대고 방문 차량으로 당당하게 주차장에 들어간다.

같이 타는 사람이 있어서 엘리베이터까진 수월했다. 하지만 현관에서 비밀번호에 막힌다.

윤대협은 전화를 걸었다.

한 번은 그냥 끊겼다. 윤대협은 곧바로 다시 걸었다. 어차피 달리 갈 곳도 없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서태웅은 전화를 받았다.

이번엔 나인 줄 알고 받았겠지. 그래서 윤대협은... 가만히 서태웅의 첫 마디를 기다렸다.

씨근거리는 숨소리만 귀를 간지럽힌다.

나쁘지 않다. 윤대협은 즐길 만큼 즐기고 느긋하게 말했다.

"열어 줄래, 비밀번호 알려 줄래?"

하... 휴대폰 너머에서 서태웅이 분노의 한숨을 내쉰다. 윤대협은 웃음을 꾹 참았다. 조금은 미안했다. 약만 놔두고 돌아설 정도로 매너 좋은 인간이 못 돼서.

전화가 뚝 끊겼다. 열어 주려나. 윤대협은 차가운 문에 이마를 툭 기댔다. 시간은 많다. 어차피 달리 갈 곳도 없다. 윤대협은 아주 오랫동안 서태웅을 생각하기를 거부해왔고 바로 그런 거부의 순간마다 서태웅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고백하지 않았는지. 고백했다면 자신은 어떻게 대답했을지. 그래서 윤대협은 아마도 서태웅을...

그 모든 일련의 사고를 멈추기 위해서. 보답받을 수 없는 마음을 막아서기 위해서.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윤대협은 아주 오랫동안 서태웅을 생각하기를 거부해 왔고. 강렬하게 거부하면 할수록 오히려 서태웅에 대해 집착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는 걸. 그때는 잘 몰랐다. 지금은 아주 명료하게 보인다.

파악이 끝나면 사고가 멈춘다. 의식보다 빠르게 행동이 시작된다. 기다리는 것도 행동의 하나. 중요한 전략이다.

문자가 왔다.

[0711]

서태웅이다. 처음 받은 문자네. 윤대협은 화면에 키스라도 하고 싶은 심경이었다. 무슨 숫자일까. 생일이 여름이던가. 나중에 준호 형한테 물어봐야겠다.

문이 열렸다.

집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윤대협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거실과 부엌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서태웅의 흔적이 보인다.

세 번째 연 방문이 침실이었다. 네이비색 침구에 파묻혀 있는 서태웅의 까치집 같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처음 봤다. 침대에 누워있는 서태웅.

윤대협은 잠시 멈춰서 그 풍경을 감상했다. 문득 오늘 하루 자신이 상당히 지쳤다는 것을 깨닫는다. 일 초라도 더 낭비하기 싫어하는 이윤의 뜻대로 최대한 빨리 진행된 절차였음에도 한 달의 숙려기간은 모든 관계자에게 지난한 세월처럼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다. 이윤과 함께 한 구 년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고 뭐하면 빠르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이혼 과정 내내 간헐적인 활화산처럼 쏟아진 이윤의 분노는 각오했던 일이지만 그렇다고 정신적 타격이 덜하진 않았다. 이윤은 더없이 냉정하고 이성적인 대화를 주고 받다가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타이밍에 격한 감정을 터뜨렸다. 쓸데없는 말실수로 이 이상 더 상처 주고 싶지 않았지만. 때로 침묵조차도 상처가 됐다.

어쩔 수 없었다. 감당해야 했다. 윤대협은 이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엄밀히 말해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스스로가 오래 외면한 만큼 더 강하게 맺힌 욕망을 알았다. 전부 다 포기해야 도전할 수 있다고 해도. 기꺼이 그럴 수 있는.

서태웅에게 다가간다. 침대 끝에 걸터 앉아 이불 아래 숨어 있는 어깨를 가만히 감싸 보았다. 티나게 움찔거린다. 목덜미에 손가락 관절을 가져다 댄다. 뜨겁다. 온도차가 강렬했는지 서태웅이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린다.

걱정이 돼서라도 얼굴을 봐야겠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머리칼 아래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식은땀이 잔뜩 엉겨붙어 축축한 앞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넘겨 얼굴과 이마를 드러냈다.

애써 떨치려다 똑바로 누워버린 서태웅이 잘 뜨지도 못한 눈으로 윤대협을 노려 본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격렬한 기침만 토했다. 안쓰러워서 어깨를 토닥여줬다. 뿌리칠 힘도 없는지 내버려 둔다. 한 세 번 정도 시도한 끝에 걸걸한 목소리가 명령한다.

"꺼져."

"약 먹어."

윤대협은 약이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보여줬다. 서태웅은 얼굴을 찌푸리고 한숨을 푹 쉬더니 안간힘을 다해 이불에서 꺼낸 팔을 뻗는다. 윤대협은 휙 뒤쪽으로 봉투를 들어올렸다. 서태웅의 팔이 닿을 수 없게. 아랫입술을 꾹 깨문 서태웅이 분노한 짐승처럼 더운 숨을 씩씩 몰아 쉰다. 윤대협은 미소지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조금 재미있다.

"밥은 먹었어?"

서태웅은 아무 반응이 없다. 부정으로 접수한 윤대협이 걱정스럽게 서태웅의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돌려 피하려고 애쓰지만 침대에는 끝이 있고 서태웅은 힘이 없다. 살짝만 손바닥에 힘을 줘도 얌전히 눌려있다. 축축하고 뜨끈한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체온을 충분히 가늠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윤대협은 서태웅의 동그란 이마에서 손바닥을 떼지 않았다. 서태웅도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르르 눈을 감는다. 약간 편해진 것 같은 호흡. 설마 시원해서 기분 좋은 건지.

이런 점이 서태웅의 문제다. 정말 큰 문제. 윤대협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서태웅이 가늘게 속눈썹을 들어올리자 퉁퉁 부은 눈꺼풀이 두 개로 얇게 접힌다.

"빈 속에 약 먹으면 속 버려. 어젠 뭐 먹었어? 집에 죽 있어?"

서태웅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눈을 감는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 아까보다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

윤대협은 참지 못하고 빙긋 웃었다.

"쉬고 있어. 금방 올게."

거실 소파 근처에서 아무렇게나 벗어 둔 트레이닝복 셋업을 발견한 윤대협은 집주인 허락 없이 잠깐 빌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법원 출석용 수트를 입고 주방에 서는 건 불편하니까. 아까 잘못 열어서 알고 있는 드레스룸에서 빈 옷걸이를 마음대로 꺼내 제 옷을 걸어 놓았다.

사실... 죽을 끓여 본 적이 없다. 윤대협은 주방에 서서 허리에 손을 얹고 전략을 세웠다. 일단. 재료가 있어야겠지. 뭐가 있을까. 여기저기 뒤져 보니 쓸만한 게 있었다. 우선 햇반. 생수.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참치캔 하나. 끝. 이 정도면 상식적으로 죽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좋아. 해 보자.

윤대협은 인덕션에 냄비를 올린 뒤 모든 재료를 넣고 일단 끓였다. 대충 미음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닐 때 조금 떠먹어 본다. 참치가 좀 많았나? 단백질이 많으면 환자한텐 좋겠지? 혹시 모르니까 조금만 더 끓여봐야겠다.

보글보글 소리가 나는 냄비를 내려다보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서태웅의 부엌에서 죽을 끓이고 있다니. 인생에 이런 장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하긴 처음부터 그랬다. 아직 한창 농구를 하고 있었을 때도. 서태웅은 항상 윤대협이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마음대로 시작했다. 더 즐거워질 수 있는 줄 몰랐던 즐거운 농구를 가르쳐주었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던 자신 안에 숨어있는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깨워주었고. 패배감을 맛보여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지 않은 것 같은 감정을 일으켜 놓고 가 버렸다.

사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집들이에 진짜로 나타난 서태웅이 자신을 완강히 피할 때 윤대협은 온당치만은 않은 답답함과 짜증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얼굴을 내밀어 놓고 뻔뻔하지는 못하고. 껴안아놓고 설명도 없이 도망치고. 끝내 다른 말로 얼버무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다시 고백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듣고 싶은 말이 뭔지도 모르는 채로 다그친 끝에야 윤대협은 알게 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서태웅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좋아하는 마음을.

서태웅의 입술에서 눈물처럼 굴러 떨어진 그 단어가 윤대협의 전신을 짜릿하게 마비시켰다. 통제할 수 없이 기뻤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 보는 벅찬 감정. 버저비터 역전승. 그 외엔 다른 무엇도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리운 감각.

그래서 혼자 후련해진 얼굴로 돌아서는 서태웅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정말 너무 치사하잖아. 윤대협은 그럴 수 없었다.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괜찮아질 거라는 적절한 반응을 두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 감각을 몰랐던 때로는. 그러려면 서태웅을 만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에. 어쩌면 농구를 몰랐던 시절까지.

이 정도면 되겠지. 윤대협은 참치죽을 그릇에 담아 위아래로 휘저으며 열기를 식혔다. 입술에 조금 묻혀 보고 적당히 식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서태웅의 침실로 간다.

윤대협이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서태웅이 들어있는 이불이 알기 쉽게 뒤척거린다. 툴툴거려도 몸은 솔직하구나. 서태웅은 역시 솔직할 때 가장 귀엽다. 윤대협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서태웅을 그대로 일으켜 앉혔다. 중력에 의해 이불이 앞으로 서서히 접히며 서태웅의 엉망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아무렇게나 구겨진 앞머리가 이마에 덕지덕지 붙었다. 붉게 열 오른 뺨에 이불자국이 선명하다. 코가 막혀서 입으로 숨을 쉰다.

윤대협은 숟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죽을 떠올렸다. 인상을 팍 찌푸린 서태웅이 죽그릇을 빼앗아 간다. 후후 불지도 않고 냅다 퍼먹는다. 윤대협이 충분히 식혀 왔으니 델 일은 없지만. 윤대협의 얼굴을 피하려는 속셈인지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 저러다 코에 묻겠다. 닦아주면 되지 뭐. 윤대협은 흐뭇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는 서태웅의 열 오른 볼따구를 바라보았다.

서태웅은 결국 윤대협이 끓인 참치죽을 마지막 한 톨까지 싹 비웠다. 기분이 좋아진 윤대협은 서태웅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시도했지만 서태웅이 아예 홱 누워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다음엔 좀 더 민첩해야겠네.

"잘했어. 물 가져올게. 잠시만."

그릇을 치우고 컵에 물을 따르는데 갑자기 심상치 않은 소음이 들린다. 의문스럽게 돌아보니 갑자기 서태웅이 방문을 박차고 나온다. 화장실로 뛰어들어 가더니.

우웨엑.

"아이고..."

윤대협은 얼른 서태웅을 따라 들어갔다. 변기를 붙잡은 서태웅의 날개뼈가 잠옷 위로 날카롭게 튀어나아 있다. 너무 많이 먹은 건지 급하게 먹은 건지. 다 토하네. 설마 너무 맛이 없어서는 아니겠지...

상체가 따스하게 울리도록 광배근을 토닥이는 윤대협의 손길을 뿌리친다. 그래봤자 어깨에 힘이 하나도 없다. 밀어낸다고 닿았던 손가락이 재차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견디느라 힘주어 윤대협의 멱살을 붙들고 매달린다. 윤대협은 자연스럽게 서태웅의 등짝을 끌어안을 수 있었다. 한 번 역류가 시작되자 저항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으으윽, 참으려고 꾹 짓누른 두 눈 아래로 생리적인 눈물이 주르륵 떨어지고, 그 정도로 온몸에 힘을 실어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거꾸러졌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어 헛구역질을 할 때까지. 윤대협은 서태웅의 조금 자란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퉤. 서태웅이 입 안에 남은 것을 변기 속에 여러 번 뱉었다. 산소가 모자라 숨을 몰아쉬는 서태웅의 작은 입술이 닦아내지 못한 타액으로 번들거린다. 윗입술이 저렇게 도톰했었나. 눈물에 푹 젖은 속눈썹이 서로 늘러 붙었다가 떨어진다. 피가 쏠려 아까보다 더 붉어진 얼굴. 뜨끈하게 달아오른 귓바퀴. 허탈하게 힘이 빠진 동공에. 조금 초점이 돌아오면서.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미약한 반응으로 윤대협을 찾아 움찔거렸을 때.

윤대협은 결국 실패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지탱해주듯이 부드럽게 서태웅의 뒤통수를 쓰다듬던 손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우웁!"

서태웅의 주먹이 윤대협의 등짝을 마구 두들겼다. 그래도 윤대협은 떨어지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서태웅의 뒤통수를, 다른 한 손으로는 턱을 단단히 붙들고. 끈질기게 키스했다.

뜨끈하고 부드럽고 물컹거리는 서태웅의 입 안은 고소한 참치기름과 시큼한 위액이 섞인 맛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이상하게도 역겹다는 감각이 조금도 없었다. 도를 지나친 욕정이 위생관념을 마비시켰는지.

윤대협의 손목을 잡아 뜯어내듯 떨쳐낸 서태웅은 다시 변기를 붙잡고 한 번 더 구역질을 했다. 더 나올 것도 없으면서. 조금 상처인데. 시무룩해진 윤대협은 양치컵을 찾아 물을 채워 내밀었다.

"너무 고열이라 그런가. 일단 해열제는 빈 속에라도 먹어야겠네."

서태웅은 대꾸하지 않았다. 변기를 짚고 일어나려다 실패했다. 다리가 풀린 사람처럼 주저 앉는다. 윤대협은 세 번 정도 기다린 다음 아예 허리를 붙들고 일으켰다. 과연 서태웅도 서 있기 힘든 상황에서 밀어내진 않았다. 그대로 거의 안듯이 부축해서 침대로 옮긴다. 힘이 빠진 서태웅이 뜨끈한 무게를 전신으로 실어 와서 좋았다. 좀 위험할 정도로 좋았다. 이렇게 접촉면이 넓은 건 아무래도 위험하지.

축 늘어진 서태웅의 상체를 베개에 기대 앉혀두었다. 약 먹으라고 챙겨 놨던 미온수를 쥐어 준다. 안 마시면 입으로 옮겨 줄 삿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아쉽게도 서태웅은 얌전히 받아 마셨다. 탈수가 위험할 정도의 구토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 윤대협은 물을 한 잔 더 가져와 약도 먹였다. 속을 좀 긁더라도 빨리 낫는 게 나을 것 같아 위장보호제와 항생제를 해열제와 같이.

반쯤 풀려있던 눈동자에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 힘없이 윤대협을 노려보는 서태웅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꺼져."

윤대협은 서태웅의 앞머리를 어루만졌다.

"응. 내일은 가야 돼."

"지금 꺼지라고."

"그럴 거면 안 왔지."

"꺼져 멍청아."

"욕에 소질 없구나 너."

입을 꾹 다문다. 불리하면 침묵이지. 대꾸 대신 크게 내뱉은 한숨이 윤대협의 얼굴까지 와서 닿는다. 뜨겁다. 발갛게 상기된 볼. 번들거리는 물기 때문에 아직 조금 구겨진 아랫속눈썹.

음. 이건 좀 아니지. 윤대협은 마음을 다잡았다. 아픈 애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물론 이미 한 번 못 참긴 했지만. 그 이상은 아무리 윤대협이라도 아닌 것 같다.

고집스럽게 고통을 견디는 부루퉁한 얼굴. 이런 건 정말 고등학생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갑자기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장면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처음 시합했을 때. 일학년 답지 않은 실력으로 덤벼 오는 게 기특하고 즐거워서 전력으로 상대했더니. 조금 심했는지. 종아리에 쥐가 난 서태웅이 넘어졌던 적이 있다. 체육관 바닥에 주저 앉아 자신의 종아리를 내려다보던 고집스러운 얼굴이 눈앞의 서태웅과 겹친다.

농구를 하다 보면 수도 없이 마주치는 그 장면이 유난히 기억에 새겨진 이유가 있다. 당시 윤대협은 가슴이 철렁했다. 다쳤을까. 너무 심했나. 부상은 아니겠지. 다시 나올까. 그런 아무리 걱정해봤자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생각이 계속 이어졌다.

파울조차 아닌 상황. 윤대협이 미안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가가서 사과하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확실히 농구와는 무관한 반응이었다.

고등학교 때 윤대협은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농구할 때와 농구하지 않을 때가 너무 다르다고. 윤대협에게는 모두 자신이었으니까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남들 보기엔 그런가보다 했다.

하지만 가끔씩. 그런 때도 있었다. 농구를 하고 있는데 농구를 하지 않을 때의 윤대협이 튀어나온 느낌. 일 대 일은 끝났는데도 농구를 할 때의 윤대협이 남아있는 느낌.

두 가지 윤대협이 동시에 존재하는 기묘한 균형.

그냥 아주 재미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농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 찰나의 현상이 늘 공유하던 단 하나의 공통점을 맹점처럼 못보고 있었다.

"서태웅."

윤대협이 부르면. 본능처럼 자신을 향하는 눈동자. 상처입은 맹수처럼 약해진 모습도.

"잘 자."

이렇게 사랑스러울 줄 몰랐다.

윤대협은 서태웅의 상체를 힘으로 눕혔다. 자발적으로 이불을 파고들어간 서태웅이 팩 돌아눕는다. 윤대협은 참지 못하고 조금 소리내어 웃었다. 동그랗게 움츠러든 등짝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서태웅의 호흡이 고르게 잦아들 때까지.

그대로 윤대협도 잠들었다.


서태웅은 눈을 떴다. 까마득한 어둠에서 가뿐하게 돌아오듯. 아무런 꿈도 없이 푹 잤다.

밤새 땀을 쭉 뺐는지 온몸이 축축했다. 사지를 무겁게 짓누르는 열감과 몸살 특유의 통증은 등가교환처럼 사라졌다. 목구멍 안쪽은 아직 불편했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몸을 뒤척여 주변을 살핀다. 몇 시지. 아침...인 것 같다.

방 안에 누가 서 있다. 서태웅은 고개를 약간 들어 눈을 가늘게 떴다. 윤대협이다.

어제도 양복을 입고 왔었나?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매고 있다. 언제 씻었는지 풀세팅이 끝나 단정하게 위로 뻗은 머리. 손질하지 않은 무성한 눈썹 아래 집중한 눈동자. 잘 뻗은 콧날 아래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구레나룻과 연결된 강인한 턱선이 바짝 세워 둔 와이드 셔츠 칼라의 날카로운 각도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길고 두터운 목선이 강조된다. 그 둘레를 감싼 넥타이를 능숙하게 다루는 기다란 손가락.

칼라를 내리고 턱끝을 들어올려 넥타이의 중심을 맞춘다. 자켓을 등 뒤로 휘돌려 한 번에 양 팔을 끼우고 라펠과 소매 끝의 접힌 곳을 툭툭 편 뒤 버튼을 하나만 채운다.

그린 듯이 멋진 남자가 완성됐다.

서태웅을 돌아본다.

눈이 마주쳐서 서태웅은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넋을 놓고 윤대협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이런 미친. 자신도 모르게 욕이 나온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열은 다 내렸는데.

윤대협이 생긋 웃는다. 순식간에 다가와 서태웅의 이마에 손바닥을 얹는다. 쪽팔림에 사로잡혀 피하지도 못했다. 어차피 열은 다 내렸다. 땀 때문에 축축하고 기분 나쁘기나 하겠지.

윤대협의 커다란 손은 이마를 지나 서태웅의 얼굴선을 절반 정도 쓸어내리고 귓바퀴를 살짝 잡았다가 떨어져 나간다. 서태웅의 얼굴은 조금 더 붉어졌다. 미친놈. 빨리 꺼져. 속으로 중얼거린다.

윤대협이 뭔가 서류 같은 걸 흔들어 보여준다.

"오늘 꼭 해야 할 게 있어서. 가볼게. 푹 쉬고.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꺼져."

"하하. 다 나았구나."

윤대협은 방문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서태웅을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눈을 돌리면 지는 느낌이라 서태웅은 눈싸움하듯이 노려보았다.

윤대협의 눈이 얄밉게 휘어진다.

"나 뭐 달라진 거 없어?"

서태웅의 시선이 윤대협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슥 훑었다. 아까 옷 입을 때 뚫어져라 쳐다봤는데도 모르겠던데. 순순히 어깨를 으쓱한다.

윤대협의 아랫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왼손으로 턱을 감싸며 말한다.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개수작 부리지 말고 꺼지라고."

"하. 그래. 다음에 천천히 얘기하자.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는 거지. 바쁘다고 안 했나. 윤대협은 왼손으로 방문을 잡고 아주 천천히 틈을 줄여나가며 얼굴을 스스슥 기울였다.

"연락할게."

서태웅은 베개를 집어 던졌다. 윤대협이 빨랐다. 닫힌 문 너머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하하하.

윤대협이 현관을 닫고 나가는 순간까지. 서태웅은 곰곰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뭐가 달랐지. 마지막까지 시야에 남아 있던. 문 틈으로 스르륵 사라지던. 윤대협의 손가락.

왼손...

"아."

반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