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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6.06.21

shape of love 3

불면의이쑤신

#spending whole life chasing true

윤대협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

"너도 윤이라고?"

이윤은 똑똑히 기억했다.

"내가 윤인데. 그럼 넌 작은 윤 해라. 후배니까."

푸하핫. 시원하게 웃어버리던 윤대협의 얼굴도.

"그럴까?"

그렇게 시작됐다. 작은 윤과 큰 윤. 물론 신장 190cm의 윤대협이 작은 윤이고 172cm 의 이윤이 큰 윤이었다. 아무래도 동양에선 크기순보단 연공서열이니까.

이윤은 친밀해진 남자들을 살살 긁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냥 성격이 짓궂기도 하고. 나름 호감이 있으니까 어디까지가 넘으면 안 되는 선인지 가늠하려는 시도이기도 했지만. 근본은 서열 확인이었다. 여자들 만날 때는 안 그런데 남자들 사이에선 왠지 자동으로 그런 모드였다. 윤대협처럼 우람하고 남성성 넘치는 인간일수록 더 그랬다.

하지만 윤대협한테는 먹히지 않았다. 대체로 진심으로 즐거운 농담이 되어 호탕한 웃음 속에 흩어져버렸고. 드물게 예리할 땐 진지하게 받아들여져버렸다. 의외로 성격 좋아. 호락호락한 게 아니라 유연하기 때문에 단단한 자아. 굳이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다. 편했다. 그러면서도 생각이 어찌나 많은지 스스로도 모르는 레이어가 계속 나와서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윤이 만난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좋은 친구였고. 최고의 룸메이트였고. 애인이었다.

그럼 결혼해도 되는 거 아닌가? 이참에 부모님 생전증여 좀 뜯고. 결혼제도에 한 번 편입된 이상 한국도 그렇게 살기 나쁜 곳은 아니다. 정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미국에서 태어난 이중국적자 이윤은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

나름 철저한 계산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브했다.

서울가정법원 현관 계단 옆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이윤은 깊이 후회했다. 결혼까지 하지 말 걸. 한국에 오지 말 걸. 지난 한 달 간 가장 많이 했던 후회. 전자담배도 아니고 연초만이 그나마 이 씁쓸함을 물리적으로 맞춰줄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이었다.

윤대협이 라이터를 내민다. 담배도 안 피면서 이딴 걸 들고 다니는 이유는. 오직 이윤한테 붙여 주려고. 그 외엔 없다.

두들겨 패는 수준으로 세차게 낚아챈다. 스스로 불을 붙이고 주머니에 넣는다. 후. 지금 이 담배는 나를 죽이는 게 아니다. 윤대협을 살리는 거다. 살인을 참는 한 개비의 니코틴.

이윤은 윤대협을 볼 때마다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윤대협이 시무룩해 보여도 멀쩡해 보여도 쓴웃음을 지어도 잘못한 개새끼처럼 얌전하게 있어도 미친 듯이 화가 났다.

개새끼가 6개월만 빨리 말했어도.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필요가 없는데. 그 모든 지랄과 시간과 에너지 낭비...

담배 연기를 내뿜는 한숨이 점차 두터워진다. 그것만이 분노로 과열된 뇌에서 김을 빼준다.

윤대협은 아무 말 없이 근처에 서 있다. 할 말이 뭐가 있나. 듣고 싶은 말도 없다. 그저 한 대 시원하게 패고 싶다. 지금까지 다소 폭력적인 분노의 표현을 아예 안 한 것도 아니건만 늘 새롭게 패고 싶다.

이윤은 충동대로 휙 돌아서서 윤대협을 마주 보고 조인트를 깠다.

악. 그런 한심한 소리를 내면서 윤대협의 무릎이 꺾인다. 그러라고 그런 거니까. 쪼그려 앉아 정강이를 문지르는 윤대협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이윤은 조금의 후회도 미안함도 느끼지 않았다.

윤대협은 쪼그린 김에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는다. 세운 무릎에 대충 얹은 손에 들려있는 이혼의사확인서 등본. 저걸 제출하면 끝이다. 드디어. 이 열 받는 면상을 안 보고 살아갈 수 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윤대협은 이윤의 말을 잘 들었다. 그래서 친해질 수 있었고. 같이 살 수 있었고. 오래 만날 수 있었고.

정말로 망설이지 않고 고백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이윤은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그때의 감정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라기보다는.

순식간에 시뻘겋게 점화하는 분노.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이 새끼야."

머리를 얻어맞은 건 윤대협이었다. 이윤은 칼날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그 새끼 맞지."

윤대협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게 곧 대답이었다. 잦은 깜빡임과 정리 못한 시선에서 감추지 못한 당황이 배어나와 이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당황 같은 걸 하네. 그런 인간 아니면서. 망설이고 있네. 대답할까 말까. 내 앞에서 그런 적 없으면서. 뭐 이제 와서 누구를 보호해보기라도 하려고?

이윤은 처음부터 의심했다. 윤대협은 첫사랑을 못 잊은 것 같다고. 이십대 때 연애 패턴에 힌트가 있었다. 여자는 모르겠는데 남자는 분명 원형이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 혈통이 섞인 어떤 남자를 랜덤하게 만나도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어렴풋이 교집합이 보인다.

그런데 자각이 없어. 무시무시한 일이다. 첫사랑이 언제였냐고 물어봤을 땐 중학교 때 만난 짝꿍 얘기나 하고. 그런 거 말고 진지한 건 언제냐고 했더니 대학 가서 사귀다가 유학 와서 헤어진 한 살 선배 여자가 나왔다. 거짓말 같진 않았다. 그게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다. 딱히 신비주의도 아니고. 자신의 과거를 남의 얘기처럼 스스럼없이 다루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내 촉이 똥촉인가 했지.

그럴 리가 있나. 아니나 다를까.

이윤은 결혼식 피로연에서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알았다. 이 사람이다. 윤대협이 이십대 때 잤던 모든 남자들은 어딘가 한 구석씩 꼭 이 남자를 닮았다. 딱 보고 비슷한 느낌은 아닌데 잘 보면 알 수 있는 공통점.

언젠가 지금까지 파편만 주워 왔던 취향에 완벽하게 딱 맞는 남자를 만나서 이윤을 떠날 것 같은 불안감. 그럴 거면 너무 늦기 전에 해달라는 간절한 부탁.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윤은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다. 윤대협의 분명한 혼인 해소 의사의 원인을. 어쩌면 처음부터 예상했던 끝이다. 배신감보다 차라리 후련함이 강했다. 결국 이윤이 옳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윤을 참을 수 없이 열받게 하는 건 주로 윤대협의 태도였다. 상황 파악 못하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고민 따위를 하고 있는 윤대협의 멍청한 얼굴. 그런 주제에 잠깐 여행 갔더니 그새를 못 참고 붙어먹었냐는 이윤의 날선 비난에는 정색을 하고 부정했다.

"아직 아무 사이 아니야."

"이 새끼 이제 날 아예 등신 취급하네."

"아니야. 너 거짓말 하는 거 싫어하잖아. 과장도."

이윤은 할 말을 잃었다. 윤대협도 이윤을 잘 알았다. 그게 너무... 열 받았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꼬셔보게 헤어져 달라?"

윤대협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망설인다. 답지 않게. 이윤을 점점 더 열 받게 했다. 아마 입을 열면 최대로 열 받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안해."

이번에도 이윤이 옳았다.

윤대협이 미안하다고 말한 건 딱 그때 한 번이다. 더 말했으면 더 맞았을 것이다. 이윤은 자존심이 상하는 경험에 익숙하지 않았다. 끔찍했다.

이윤을 가장 열 받게 하는 건 윤대협의 타이밍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 말했으면 그냥 뺨 한 대 정도로 헤어지고 끝이었다. 이 미친 새끼는 굳이 양가 인사 다 드리고 부모님 도움에 대출을 포함해서 부동산을 구입하고 인테리어까지 마치고 청첩장 돌려서 결혼식 올리고 신혼여행과 혼인신고까지 종료된 시점에서 끝내 지랄을 냈다. 심지어 내가 누누이 경고했는데도! 이 씨발 나한테 왜 이래? 원수졌어?

궁극의 비효율. 이윤이 이 세상에서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 이게 뭔 헛짓거리냐고. 한편으로는 허탈하다. 부모 돈 좀 땡겨보려다 허공에만 뿌렸네. 솔직히 한국에 별로 많지도 않은 친구들과 친척들 앞에서 쪽팔린 건 문제도 아니다. 제일 타격 없다. 순전히 윤대협 유책으로 이혼 당한 거니까. 피해자 코스프레하면서 심신 안정 좀 하다가 귀찮아지면 미국으로 튀면 되고.

더 미치겠는 건 이 새끼가 진짜 정말로 전혀 몰랐던 것 같아서.

내가 의심하고 찔러보고 으름장 놓는 육 년 세월 내내...

아무 얼굴도 떠올리지 못한 것 같아서...

한국에 오자마자 이렇게 될 거라고는 정말 몰랐던 것 같아서.

그게 답답하고 빡치고 속에서 천불이 났다. 이윤은 킥복싱을 시작했다. 물리적으로 뭔가를 두들겨패고 싶었다. 아침이건 저녁이건 샌드백만 두들겨 패다가 집에 가면 침대에 뻗어서 손 하나 까딱 안 했다. 의식주는 전부 돈으로 해결했다.

이혼 절차는 윤대협이 전부 맡았다. 당연한 일이다. 급한 새끼가 알아서. 결혼제도의 빡치는 점은 깨는 과정도 어쨌든 둘이 해야 한다는 거다. 배신자는 한 놈밖에 없는데도. 협의이혼의사확인서의 혼인 해소 사유는 이윤이 적었다. 남편의 부정. 윤대협은 반박하지 않았다. 또 한 대 패고 싶어졌지만 이윤이 가까스로 참았다. 킥복싱을 등록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민간인 패지 말아야지.

위자료는 신혼집이다. 최저 금리 한도까지만 땡겼던 대출을 윤대협이 영끌해서 한 번에 털었다. 개털 됐네. 꼴 좋다. 그건 이윤의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수단이었다. 고스란히 자산이 된 신혼집의 시세를 떠올리기. 위자료의 순기능에 충실했다.

그 집에서 하루라도 더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윤은 친정으로 들어갔다. 스무살 이후로 같이 살아 본 적 없고 그게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던 부모님이지만 지금은 가족이 필요했다. 이윤을 불쌍히 여기고, 같이 윤대협을 비난할 가족. 경제적으로도 나았다. 일주택자 유지하면서 세 놓다가 올랐을 때 팔아치우고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윤대협이 지금 어디서 지내는진 모른다. 알고 싶지 않다. 알면 새벽에 자다가 열 받아서 벌떡 벌떡 일어날 때 쫓아가서 두들겨 팰지도 모른다. 범죄자가 되어 출국이 어려워지면 이윤도 곤란하다.

실은 이윤이 나설 필요도 없다. 최근 윤대협을 노리는 보복범죄위원회가 발족했다. 얼마 없는 한국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했다. 우리 윤이 인생에서 제일 예쁜 시기 독점해놓고 이렇게 뒤통수를 치냐며 펄펄 뛰었다.

아 그런 이유로? 마음은 고맙지만 이윤은 그 지점에서 별로 화가 나진 않았다. 윤대협의 제일 예쁜 시절도 누구보다 이윤이 알차게 빨아먹고 즐겼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이윤이 이득이다. 첫사랑인지 뭔지 잘 된다고 쳐도 이제 윤대협은 늙어갈 일만 남았다. 돈도 없고. 친구들의 빗나간 분노는 오히려 이윤에게 냉정함을 되찾아주었다.

할 말은 다 했고 들을 말은 처음부터 없었다. 등본은 윤대협 혼자서 제출해도 유효하다.

이윤은 마지막 담배 연기와 함께 저주를 내뱉었다.

"넌 실패할 거야."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은 윤대협의 정수리로 내려가는 하얀 연기. 이윤을 올려다 보는 윤대협의 입꼬리가 약간 움직였다.

"이미 했잖아."

"또 할 거라고. 넌 너를 몰라. 근데 잘 안다고 생각해. 그래서 영원히 망한 거야."

윤대협의 시선이 허공을 묵묵히 바라본다. 이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눈빛. 이윤의 말을 곱씹고. 사실인지 냉정하게 검토하고. 옳은 것 같다면 기꺼이 수용하는 윤대협.

"그런가..."

이건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의 반응이다.

사실 이윤도 알고 있다. 머리 굴리느라 행동이 신중한 윤대협. 자기 자신의 진짜 욕망을 잘 모르는 윤대협. 그러면서 제법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윤대협.

이번엔 아니었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렇게 진실한 욕망을 성급하게 드러내는 윤대협은.

처음이었다. 최소한 이윤은 본 적 없었다. 그건 윤대협이 이윤에게 한 첫번째 고백이었다. 지금은 너를 꽤 좋아하고 어쩌면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조차 고백이라 할 순 없었다. 그때 윤대협은 담담히 사실을 인정했을 뿐이다.

이번엔 달랐다. 차원이 달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윤만이 알 수 있었다.

윤대협은 이윤이 평소에 세뇌시키고 훈련시킨 바에 따라 순순히 비밀을 털어 놓은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윤대협은 이윤을 아낀다. 사랑한다. 어떤 면에선 지금도 여전히.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윤대협은 이윤을 결코 상처주지 않는다. 이윤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이 윤대협에게도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한 때의 실수도 아니고 감정의 흔들림도 아니고 이윤에 대한 불만도 아니다.

지독한 상처를 감수하고서라도 가져야만 하는 것.

윤대협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다. 이윤은 구 년만에 처음 알았다.

한 때 문란하다는 비난도 들었지만 윤대협은 오히려 성적인 욕구에 거의 휘둘리지 않는 편이다. 정확히는 연애나 사랑 같은 관계를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다. 무게추가 적었다. 윤대협의 인생에서 훨씬 중요한 일은 항상 따로 있었다. 학업이나 취업이나 뭐 그런 현실적인 중심. 자기 자신과의 관계.

이윤은 처음부터 연애나 사랑이 아닌 생활과 반려로 시작했기에 의미가 좀 달랐고 자연스럽게 미래를 함께 그리게 된 것이다. 이윤에게도 그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의미로 서로 특별했다. 대체 불가능한 관계라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편안히 맞춰진 것. 억지로 무리하지 않아도 나아가는 것. 스스로 선택해서 소중히 여겨온 것.

다 내팽개치고 무작정 손을 뻗는 눈 먼 열정이 윤대협에게도 있었다고.

그래서 이윤도 거짓말을 했다. 구 년만에 처음으로. 윤대협에게. 너는 실패할 거라고.

솔직히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이윤과 헤어진다고 그놈의 첫사랑과 잘 될 거란 보장은 없다. 경제적으로도 개털 됐고. 인맥으로 장사하는데 고객들이 전부 우리 결혼식에 와 주신 분들이고 그놈의 첫사랑과는 같은 업계시네. 어찌저찌 맺어진대도 소문 드럽게 나기 싫으면 평생 숨기고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윤대협은 실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윤대협은 알고 시작한 거니까. 고통은 피할 수 없고 비난은 지난할 것이며 그걸 다 견뎌낸다 해도 끝내 참패할 가능성도 있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했기 때문에. 그만큼. 다 걸어야 할 정도로... 포기할 수 없다면.

윤대협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윤에게 돈을 걸라고 한다면... 이런 상황에도 틀림없는 스스로의 계산이 좀 짜증나지만...

그럴 때의 윤대협은 대체로 이긴다.

진동소리가 들린다. 윤대협이 긴 다리를 천천히 펴면서 주섬주섬 일어난다.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더니 잘못한 개 같은 표정으로 이윤을 쳐다본다.

"미안. 이건 받아야 될 것 같아."

이윤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꽁초를 대충 던지고 새로운 담배를 꺼냈다. 계단 옆에서 통화하는 윤대협의 뒷모습. 짧은 통화였다. 윤대협이 한 말이라고는 알겠어 밖에 없었다. 일방적으로 끊겼는지 잠시 휴대폰을 쳐다보다 대단히 난처한 얼굴로 이윤에게 돌아온다.

"가야할 것 같아."

"빨리 꺼져."

윤대협은 허리를 굽혀 방금 전에 이윤이 매너 없이 틱 던진 담배꽁초를 바닥에서 주워 쓰레기통에 던졌다. 손에 든 등본을 잘 챙겼다는 듯 살짝 들어 올린다.

"조심해서... 들어 가고."

"지랄은."

윤대협이 바로 돌아서지 못하고 어색하게 주춤거린다. 왜 또 무슨 빡치는 말을 하려고 그래. 이윤은 대번에 인상부터 썼다.

"고마웠다고 말해도 될까."

이윤은 말없이 필터를 씹었다. 입 안이 드럽게 쓰다.

입술에서 담배를 꺼내고 윤대협의 얼굴을 정조준해 뿜는다.

깜빡이는 눈동자를 향해 저주를 뱉었다.

"확 차이기나 해라. 비참하게."

윤대협은 하핫. 처음 만났을 때처럼 웃었다.

"그럴지도."

뒤돌아 가는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며 주차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윤대협의 뒷모습에 이윤은 기가 막혔다. 누구 연락인지 안 봐도 뻔하네. 그런 주제에 기만질.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조인트 한 번 더 깔까.

다 귀찮다. 이윤은 킥복싱짐에 처박혔다가 그대로 하루를 끝낼 생각이었다. 휴대폰으로 택시를 잡는다.

첫사랑에 미련이 남은 게 결혼생활을 못할 정도의 하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한국에선 주류 감성인지도 모른다. 첫사랑은 첫사랑이고. 결혼은 결혼이고. 아직 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있다는 단계에서 부정이라고 단정짓는 건 확실히 보통의 감각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윤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결국 이윤도 그 정도로 윤대협을 사랑한 건 아니다. 자존심 다 버리고 가끔 다른 사람 생각해도 좋으니 옆에만 남아달라고. 혹은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그런 말이 죽어도 입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윤대협은 좋은 친구였다. 최고의 룸메이트이자 섹스 상대였다. 충실한 애인이었다. 다른 사람을 원하면서 이윤 옆에 남아있는 불행한 모습 같은 건 그 누구보다 이윤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이윤은 윤대협의 곁에 있기 위해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윤대협에게 그런 식으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면...

빨리 꺼지라고 할 수밖에...

택시에 실려 가면서 이윤은 윤대협의 마지막 뒷모습을 생각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스피드. 낯설었다. 문득 윤대협이 잘 모르는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 년 동안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부터의 윤대협은 전혀 모른다.

아마 윤대협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