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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6.06.21

shape of love 1

불면의이쑤신

#제멋대로 헤맨

"그 후배는 안 온대?"

침실 베개에 기대 패드로 논문을 읽던 윤대협이 고개를 들었다. 정작 질문을 던진 이윤은 화장대의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잘 준비의 막바지인 스킨케어 루틴에 푹 빠져 있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광경인데.

이상한 공기가 감도는 것도 같고...

평상시의 분위기로 돌리고 싶어 윤대협은 다시 시선을 패드 화면으로 옮긴다. 딱히 글자가 읽히지는 않았다.

"후배 누구?"

짐작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일부러 묻는다. 이윤은 쳐다보지도 않고 즉각 대답했다.

"좋아한다고 했던 후배."

짐작대로다. 그래서 윤대협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 장면이라면 당사자로서 충분히 고찰해봤다. 누구보다 깊게. 신혼여행 중에도. 그 이후에도.

"축하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윤이 휙 돌아본다. 윤대협은 시선을 느끼고도 여유를 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미심쩍은 목소리. 탐색하는 눈동자. 윤대협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한 가지는 조금 놀랐다. 이윤도 그 말을 들은 줄은 몰랐다. 충분히 고찰해 본 결과 대수롭지 않았던 것으로 애써 정리된 장면이 아내의 입에서 상기되다니. 별로 유쾌한 상황은 아니다. 윤대협은 은은한 고소가 얼굴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이윤이 다시 거울을 바라본다.

"전 남친?"

"그럴 리가. 그럼 결혼식에 안 불렀지."

"하긴."

추궁 비슷한 것은 싱겁게 끝났다. 애초에 함정 질문이다. 이윤이 모르는 윤대협의 전 남친 같은 건 없다. 윤대협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수행 차원에서 수용할 수 있었던 건 한국을 떠난 이후였다. 거기서 이윤을 만났다. POC 퀴어들끼리 모인 암묵적인 커뮤니티에서 한국인 바이는 윤대협과 이윤 뿐이었다. 금방 가까워졌고 오랫동안 친구였다. 자연히 서로의 연애사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봤다. 윤대협도 이윤의 전 여친을 대체로 다 안다.

그래서 둘 사이에 이런 질투랄까 의심은 상당히 생소한 일이다.

이윤이 매끌매끌해진 얼굴로 침대에 들어온다. 핸드폰 만질 타이밍인데 그러지 않고 아직 눕지 않은 윤대협을 빤히 쳐다본다. 윤대협은 별로 심각하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왜? 수상해?"

"너무 잘생겼어..."

"내가?"

나름대로 애교를 담은 눈웃음. 하지만 이윤은 받아주지 않았다. 칼 같이 대답한다.

"아니. 그 후배."

"아. 그렇긴 해."

수긍하는 윤대협의 목소리에 조금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어쩔 수 없다. 한때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친구로서 서로의 핸드폰 속 데이트 어플 화면을 동시에 공유하며 왼쪽으로 넘길 건지 오른쪽으로 넘길 건지 논한 바 있는 이윤은 윤대협의 외모 취향을 윤대협보다도 잘 알고 있다. 막상 윤대협 본인은 상대의 외모는 준수하기만 하면 그렇게 세세하게 따질 생각 없었지만. 이윤은 확신을 가지고 딱 잘라 말하곤 했다.

아니. 너 남자는 완전 타입 있어. 여자는 잘 모르겠는데 남자는 확실해. 일단 백퍼센트 아시안계고.

그 이후로 줄줄이 늘어놓은 묘사는... 당시의 윤대협에게는 적당한 충격이었다. 이제서야 인정하는 거지만.

그래서였다. 아마 그 후배가 단순히 너무 잘생긴 게 문제가 아닐 거라고. 윤대협은 이윤의 말하지 않은 마음도 짐작할 수 있었다.

더 할 말도 없으니 잠이나 자고 싶다. 윤대협은 패드를 내려놓았다. 무드등 수준의 조명을 완전히 끄려던 순간. 누워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이윤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윤대협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윤이 선언했다.

"지겹도록 했던 소리 또 할게. 중요한 거니까."

나직하고 단호하고 발음이 정확하다. 윤대협은 이윤의 이런 점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 좋아지면 바로 말해. 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원하는 게 분명하고. 더없이 명료하게 표현한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불안 발작처럼 보일 이런 얘기조차도.

이윤은 처음 윤대협과 사귀자고 할 때부터 일관적으로 요구했다. 다른 사람 좋아지면 언제든지 말해. 떠나고 말고는 그때부터 둘이 같이 얘기하더라도. 나 배려한다고 둘러대지 마. 가짜는 필요 없어. 시간 낭비야.

윤대협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꿈지럭거리며 투덜거렸다.

"너 그럴 때 가끔 등 떠미는 것 같아. 빨리 다른 사람 찾으라고."

"아~ 너무 자주 안 말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내가 불안하게 해?"

"뭘 한 건 아니고. 넌 그냥 불안해."

"너무하는데."

전혀 타격이 없는 어조로 투덜거리는 윤대협에게 이윤이 보란 듯이 코웃음을 친다. 조명을 끄고 눕는다. 여느 부부들이 잠자리에 들 때처럼 다정히 서로를 끌어안는다.

친구였을 때 이윤은 윤대협을 자주 타박했다. 문란하다고. 도덕적인 훈계가 아니고 양성애자 스테레오 타입 확산시킨다는 정치적인 이유였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나 같은 선량한 바이가 양쪽에서 오해 받고 탄압 받잖냐. 당사자만 가능한 질타였다. 당연히 윤대협도 딱히 타격은 없었다. 그래 그래. 적당히 할게. 딱히 열심히 갈아탄 건 아니다. 공급이 많으니 수요를 제한할 이유가 없었을 뿐.

그런 놈인 줄 알면서 진지한 관계를 제안한 건 이윤이다.

그런 놈이었음에도 생각보다 편안하게 이윤에게 정착한 것도 윤대협이다.

친구로 삼 년 연인으로 육 년. 서로의 히스토리를 다 알기에. 존재 자체가 불안한 놈이라는 폭언도 가벼운 야유일 뿐.

이윤이 말하는 불안은 이십대 때 목격했던 육체적인 가벼움과는 무관하다. 그 정도 기본적인 신뢰 없이 결혼할 만큼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이불 속에서 이윤이 중얼거렸다.

"너를 신뢰를 안 하는 게 아니고... 신뢰에 기대서 부탁하는 거야."

이 얘기 아직 안 끝난 건가. 윤대협은 약간 피곤해졌다. 본격적으로 졸리기 시작해서 그런지도.

몽롱한 정신을 파고드는 이윤의 또렷한 목소리.

"꼭 말해. 지체없이 말해."

다른 사람 좋아졌을 때.

친구 말고 애인을 시도해 보자고 제안한 건 이윤이었다.

벌써 육 년 전. 고작 스물다섯 살. 학부 졸업 후 MD 입학을 준비하던 이윤과 대학원생 이 년차 윤대협은 이미 같이 살고 있었다. 살인적인 집세를 아끼기 위한 학생 동지이자 가장 안정적인 룸메이트로.

이윤은 1년을 채울 뻔한 전 여친과 헤어지고 나서 6개월 정도 아무도 안 만나고 있었다. 메디컬 스쿨 입시에 집중하는 것이려니. 윤대협도 별 말 안했다. 그냥 평범하게 지냈다. 학위 과정에 집중했고 농구 게임을 보러 다녔고 친구들을 만나서 놀았고 가끔 데이트 어플에서 대충 마음에 드는 사람이랑 매칭이 되면 데이트를 하거나 섹스를 하기도 했다.

그날은 오랜만에 둘이서 함께 저녁을 시켜 먹었다. TV도 안 켜고 영화도 안 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지난 주에 윤대협이랑 농구 보러 가려고 집에 들렀다가 이윤과 스쳐 지나갔던 대학원 동기가 제발 소개시켜 달라고 졸랐다는 얘기가 나왔다. 일주일 넘게 까먹다니. 약간 미안했다. 이윤이 바빠서 어쩔 수 없었지만.

반응은 안 좋았다.

"별로 사귈 생각 없어."

"그래? 네 취향 아니야?"

"니가 뭘 알아. 내 취향을."

"음... 남자는 일단 키 커야 되고. 잘생기고. 잘 웃고. 뭔가 서글서글하고 외향적인 느낌. 맞지?"

"뭐야. 왜 다 맞지? 기분 나쁘게?"

이윤의 얼굴이 험악해질수록 윤대협은 즐겁게 웃었다. 그 때까진 정말 친구사이였다.

"너야말로 남자 취향 대쪽 같잖아."

"또 그런다."

"맞는 말인데 인정을 안 하니까. 드물게."

"음... 인종 선호는 인정."

"아니라고. 진짜 다 비슷하다고."

이윤은 윤대협의 눈앞에 다섯 손가락을 들이밀고 하나씩 접었다.

"일단 무조건 턱선 뾰족하고. 머리카락 까맣고. 무쌍이거나 속쌍. 키는 너보단 작음. 마른 건 가능인데 통통은 불가능."

"지난번에도 생각했는데. 머리카락 까만 건 그냥 아시안계면 다 포함 아니야?"

"그니까 염색하면 바로 나가리잖아."

할 말이 없어서 윤대협은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를 만날 때 특정한 외적인 조건을 정해두고 본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냥 끌리면 오케이. 안 끌리면 넥스트.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이윤이 손에 꼽는 애매한 특징들이 모여서 어떤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는 것이 왜인지 불편했다. 거부감이 들었다.

이윤이 다시 검지손가락 하나를 새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여자랑 연애하고 헤어지면 꼭 남자랑 자는 패턴."

"그건 너도 그렇잖아."

"너처럼 정기적이진 않아."

"아니, 그게 뭐... 그렇게 꼭 필요한 건 아냐."

"그러시겠죠."

"정말 아닌데."

"난 진지하게 남자가 그리워서 헤어지는 줄 알았는데."

"넌 나를 지나치게 쓰레기 취급하는 경향이 있어. 서운해."

"윤대협. 걸어다니는 바이 혐오 프로파간다."

"쓰레기랑 같이 살면 너도 쓰레기야. 잊지 마."

비방에 가까운 인사이드 조크를 주고 받으며 킥킥 웃는다. 이윤은 음료수를 더 꺼내려고 냉장고를 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로 정기적이었단다. 턱선이 날렵한 까만 머리 북방계 이목구비 아시안 미남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런가? 이윤이 예리하게 정곡을 찌를 때면 늘 그렇듯 윤대협은 잠깐 그러한 주장이 사실인지 머릿속으로 검토해보았다. 그럴지도 모른다. 패턴만 보자면.

"그것 때문에 헤어진 건 정말 아니야."

"그럼 왜 헤어졌는데?"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윤대협의 연애라고 말할 만한 관계는 주로 여자들의 체념으로 끝났다. 윤대협의 마음이 자신 같지 않다는 결론. 그게 결혼에 대한 생각이든 서로에 대한 열정이든 이상적인 감정적 교류의 패턴이든. 윤대협은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가 감정적으로 격하게 나올 때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랬구나 하고 차분하게 감정을 받아준 후에 물어보는 편이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몇 번 이런저런 제안과 타협이 오간 뒤에 모두의 최종 결론은 헤어지는 게 좋겠다는 거였다.

이런 설명을 다 들은 후에 이윤이 꺼낸 말은.

"그럼 나랑 사귀면 헤어질 일 없겠네."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나랑 만날래?"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윤대협은 눈을 조금 크게 뜨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반응도 곧바로 하지는 못했다. 놀라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습관적인 검토가 시작되었다. 이윤과 연애한다?

이윤은 방금 가져 온 음료수를 원샷했다. 알코올은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평범한 이온음료였다.

"그냥 솔직하게 대답해. 속으로 생각만 이리저리 굴리지 말고."

평소와 똑같이 단호하고 명료한 말투. 그러나 평소보다 약간 빨라진 템포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지금은 날 적당히 배려하지 않는 게 진짜 배려하는 거야."

이윤은 항상 윤대협에게 무엇을 해야할지 명확하게 요구한다. 그래서 윤대협은 있는 그대로 신중하게 검토해 보고. 할 수 있으면 수용하고 할 수 없는 건 거절하곤 했다.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편했다. 최장 기간 룸메이트일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이번에도 윤대협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솔직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신중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윤대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랑 그런 건 생각 안 해봤어."

"지금부터 시도해 볼 의사는?"

여기서부터는 솔직히 호기심을 느꼈다. 윤대협은 스스로의 흥미를 인정하기로 했다. 3년 간 베스트 프렌드이자 룸메이트였던 사람과의 연애도... 불가능은 아니군.

안 가 본 길에 대해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싫다. 그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순간의 호기심을 소중히 여겨왔다.

"안 될 거 없지."

"그래. 그럼 일단 자 보자."

"응?"

윤대협은 자신도 모르게 턱을 괴고 있던 손에서 얼굴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윤이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린다.

"그게 핵심인 거 아냐?"

"그... 런가?"

"난 그래. 그리고 차이더라도 하나는 남잖아."

이윤이 식탁에서 일어났다. 윤대협의 어깨를 잠깐 짚고. 귀에 속삭인 다음 저벅저벅 걸어갔다.

"윤대협 따먹은 거."

침실로.

윤대협과 이윤은 그렇게 시작했다. 서로 성적으로 매우 활발한 시기에 만났기에 처음이라 할 만한 건 별로 없었지만. 딱 한 가지. 윤대협에게 있어 이윤은 처음으로 친구이자 연인인 사람이었다. 자 본 남자들이나 연애해 본 여자들과는 결코 친구가 되지 못했다. 그런 척은 했을지 몰라도.

이윤은 처음부터 친구였다. 그게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냥 좋은 시간 같이 보내는 다른 친구들보다도 더 가까운 친구.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친구. 룸메이트가 된 이후로는 이미 삶의 동반자나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다른 연인이 있을 때도 동거는 별 탈 없이 유지됐다. 윤대협은 결혼 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윤이 결혼할 때까진 이대로 쭉 살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하던 차였다.

그러니까 이윤은 처음부터 지난 연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위치에서 시작했다. 본인도 그걸 잘 알았다. 그래서 과거의 관계나 제삼자로 인해 불안해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 너랑 나는 그래야 얘기가 돼. 난 거짓말은 못 참아.

윤은 처음부터 분명하게 요구했다. 그래서 둘은 별로 싸울 일이 없었다. 윤대협은 시간이 필요할 때는 있어도 솔직한 편이었다. 이윤을 만나면서부터는 굳이 말하지 않고 생략했던 감정이나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까지도 조금씩 가닿는 연습이 됐다.

이윤이 윤대협을 아는 만큼 윤대협도 이윤을 안다. 결국 이윤이 견딜 수 없는 건 육체적 배신보다 내면적 배신이다. 윤대협의 침묵. 항상 분명하고 명료하고 곧바로 표현하는 이윤과 달리 윤대협은 떠올리는 모든 것을 굳이 입에 올리는 성격은 아니다. 생각은 주로 말이 되기보다는 행동이 된다. 스스로에게 시간을 좀 주고. 혼자 정리할 수 있는 건 혼자 정리한다. 윤대협은 그게 자연스럽다.

고요하기 때문에 결코 알 수 없는 윤대협의 내면. 심지어 감추는 것에도 능숙하다. 어떨 땐 자기 자신까지 속인다.

한편 이윤은 속는 것을 싫어한다. 원래 성격도 그렇고 트라우마도 좀 있다. 의사가 된 것도 모든 것을 드러내고 밝혀내고 끄집어내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도 언제나 똑바로 보고 있다.

넌 너무 생각이 많아.

이윤은 항상 윤대협에게 투덜거렸다. 윤대협은 이윤의 그런 면을 좋아했다. 명료하고. 단호하고. 한 번 결정하면 뒤돌아보지 않는다. 직관적이다. 어떨 땐 윤대협보다 윤대협의 마음을 먼저 알고 있다.

연인으로 육 년을 만나고 결혼했다. 이윤은 한 번도 제삼자로 인해 윤대협에게 불안을 느낀 적이 없다.

결혼식 날. 서태웅이 그런 말을 하기 전까진.

윤대협은 농구로 대학에 갔지만 그 이후로는 다른 데에 흥미가 생겼다. 무려 학업. 그것도 물리치료. 부상이 아니면 상관 없다고 생각했던 영역인데. 선배들 따라서 고등학교 때까지는 몰랐던 체계적인 컨디셔닝 관리를 접하면서 신세계를 보았다. 부상을 당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라고들 했다. 그렇다면 물리치료도 결국 실력에 관여하는 분야가 아닌지.

그런 관심으로 복수전공을 시작했다. 농구랑 동시에 하려니 만만치 않았다. 2학년 때 전과를 결정했다.

주변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갈렸다. 아까워 죽겠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 현실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며 응원하는 사람들. 윤대협은 둘 다 애정에 기반한 반응이라 감사하게 여겼고 굳이 냉정하게 따지자면 둘 다 헛다리라고 생각했다. 그냥 지금 가장 재밌다고 느끼는 걸 선택했는데. 윤대협은 항상 그랬다. 어느 정도 자신의 잠재력이 예측 가능한 궤도에 오른 뒤에는 새로운 것이 궁금해졌다.

스물 두 살에 학부 졸업 후 유학을 갔다. 미국에서 물리치료 학위를 따려고. 왜 미국이냐면.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있지만. 일단 스포츠 쪽으로는 세계 최고니까. 무엇보다 NBA 보고싶었고.

해외 생활은 재미있었다. 심심할 틈 없고. 다양한 사람 많이 만났고. 이윤을 만났고. 그 무엇보다도 학업이 엄살 없이 바빴다. 미국 학부에서 프리 과정을 일 년 반 거쳐서 전문대학원에서 다시 삼 년. 그 후엔 사립대학 농구팀에서 트레이닝 수석 코치로 이 년 좀 넘게 있었고. 그 다음엔 진짜로 NBA...는 아니고 G리그에서 일 년 정도 트레이닝 스태프로 일했다.

윤대협이 프로 리그에 취업한 해에 서태웅은 자국 리그로 돌아갔다.

윤대협은... 그 때의 감정에 붙일 이름을 잘 모른다. 실망까지는 아니다. 언젠가 마주치지 않을까 기대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안도라고 하면 좀 이상하다. 안도할 일이 뭐가 있다고.

서태웅은 고등학교 이학년 때 미국에 갔고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NCAA에서 NBA로 직행했고 꽤 솔리드한 활약을 보였다. 특히 현대 농구에서 찾기 어려운 미드레인지 싸움을 탁월하게 잘했기에 체격과 체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대체로 가위와 주먹만 내는 게임에서 보자기를 가진 팀은 언제나 유리하니까.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쉽지 않았다. 괴물 같은 피지컬의 선수들이 늘어나며 전반적인 파울 기준이 애매해진 경향성을 따라서 자연히 플레이도 거칠어졌다. 머리채를 잡히고 공중에서 밀쳐지고 툭하면 드러눕고. 부상이 잦아지며 출전 시간이 점차 줄어드는 사이 새파랗게 어린 경쟁자들이 치고 올라왔다.

모두가 서태웅의 다음 시즌 계약을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하던 때. 서태웅은 귀국을 선언했다. 열아홉부터 스물아홉까지. NBA 커리어 십 년의 종료였다.

아직 선수로서 기량은 충분했다. 국내 농구계는 환호했다. 서태웅 계약하면 용병 한 명 더 쓰는 건데 규정 위반 아니냐며 논쟁이 붙었다고. NBA에서도 잠시 해외 토픽 뉴스로 다뤘었다. 어쨌든 서태웅은 리그에서 특정 문화권의 대표자였으니까.

이게 농구팬 윤대협이 알고 있는 서태웅의 전부다.

서태웅은 고등학교 이학년 때 미국에 갔고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게 고등학생 윤대협이 알고 있는 서태웅의 전부다.

그리고 오랫동안 확신할 수는 없었던 게 한 가지 더...

서태웅은 윤대협을 좋아했다. 아마도.

그런 생각은 서태웅이 떠나고 나서야 들었다. 아마 서태웅이 자신을 좋아했었다고.

증거가 있냐고 윤대협은 윤대협에게 묻곤 했다. 물증은 전혀 없었고 심증도 애매했다. 그러니 같은 지역에서 일 년 내내 얼굴 보고 농구할 때는 그런 생각을 못한 거겠지.

그냥 라이벌. 주변에서 항상 말하곤 했다. 그 이상의 발상은 없었다. 제법 잘하고. 아마 같은 나이대에선 전국에서 제일 잘하고. 한 살 어린 주제에 질 생각이 없고. 그런가 하면 갑자기 같이 농구하자며 학교 앞으로 스스럼 없이 찾아 오기도 하고. 고민이 있으면 물어 보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지만. 마냥 방심할 수 없는. 언제 나를 뛰어 넘을지 몰라서 진심으로 재미있는. 그렇게 갑자기 떠날 줄은 몰랐던. 그냥 그게 다였다.

윤대협이 기억하는 서태웅은 항상 코트에 있었다. 아주 조용하지만 아주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윤대협을 노려보거나. 망설임 없이 덤벼 오거나. 피하지 않고 막아 서거나.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지 않았고. 여차하면 제 기술을 그대로 따라해 보였다. 경험과 전략의 폭을 제외하면 이미 자신과 동일한 수준의 선수였다. 1학년인데도 그랬다. 진지한 얼굴도 숨길 수 없는 감정도 농담 같은 도발도, 분하거나 깜짝 놀라거나 보란듯이 으스대거나, 질문을 던질 때도 답을 구할 때도 서태웅은 항상 코트에 있었다. 윤대협 앞에서는 그랬다.

딱 한 번. 윤대협의 학교 앞 기차역에서 마주쳤을 때를 빼고.

그리고 농구 코트까지 천천히 걸어갔을 때.

뭐가 그렇게 급한지. 자꾸만 빨라지던 서태웅의 발걸음에 왠지 비어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으며 속도를 맞췄던 여름날의 오후. 바다가 참 예뻤다. 바다를 보느라 걸음이 다시 느려졌다가. 아차 싶어서 앞을 바라보면.

앞서 가던 서태웅이 멈춰 서서 윤대협을 돌아보고 있었다.

윤대협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까딱. 쿨하게 재촉하는 제스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다려 줬던. 고요한 침묵. 그때의 서태웅. 길게 자란 앞머리가 드리운 그림자 사이로 윤대협에게서 눈 떼지 않는 묵묵한 시선. 농구공 하나 없는 편안한 복장으로 주머니에 자연스럽게 꽂은 양손. 여름볕을 반사하는 목덜미 위에 발갛게 익은 귓바퀴 끝.

아마도 그때 서태웅은 윤대협을 좋아했던 것 같다. 물증은 없다. 증인도 없다. 그때의 서태웅은 윤대협만 안다. 그래서 윤대협만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고.

그런데 왜 고백을 안 했지? 그럴 기회는 많았던 것 같은데.

윤대협은 윤대협에게 물었다. 고백했으면. 어쨌을 건데?

자신의 감정은.

그때 윤대협의 감정은...

이걸 떠올린 것 자체가 서태웅이 떠나고도 한참 지난 시점이었다. 윤대협이 어른이 된 이후에. 자신이 남자와도 연애할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은 시점과 비슷했다. 그러면 혹시 그때도. 그것도. 그런 식으로. 이제 와서 고등학교 때 자신의 감정이 어땠는지 따위를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실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윤대협은 알지 않기를 택했다. 지나가면 지나가지겠지. 잊고 살면 잊혀지겠지.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어지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없었던 일로 착각하는 편이 훨씬 쉽다. 서태웅이 윤대협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깨달음 자체를 포함해서 싹 잊어버리기에도. 일 년이면 충분할 거라고 윤대협은 예상했었다.

오산이었다. 서태웅 앞에서 윤대협의 산수는 언제나 엉망이다. 이제 앞에 있지도 않은데. 최소한 오 년은 넘게 윤대협은 서태웅을 잊지 못했다. 좋아한 적이 있었는지조차 확실치 않은데도 그랬다. 아마 서태웅은 윤대협을 좋아했었던 것 같지만... 고백할 정도의 마음은 또 아니었을 수 있고... 그 문장만이 확신과 의심을 오가면서 또렷해졌다가 흐릿해졌다가 조리개가 고장난 옛날 카메라처럼 가까워지다가 멀어지곤 했다. 정작 잊혀지지는 않으면서 그랬다.

지나간 일인데 거리가 조절되지 않으니 그야 잊는 것도 무리겠지. 어느 순간 윤대협은 포기했다. 농구 덕분에 아주 즐거웠던 고등학교 시절. 서태웅은 그중에서도 윤대협이 가장 즐거웠던 원인이다. 당연히 강렬하게 긍정적으로 뇌에 새겨져 있겠지. 그건 자연스럽다. 애매한 감정에 대한 찝찝한 추측이 붙은 건 유감스럽지만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니까.

그날의 깨끗한 햇살은 윤대협의 기억 속에서 종종 아무 이유 없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떠올랐다. 혼자서 그 길을 걸어가는 꿈을 꾼 적도 많았다. 그냥 고등학교 시절이 오랜만에 꿈에 나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윤대협은 서른살에 NBA 트레이닝 스태프가 되었다. 서태웅이 없는 것이 확실한 시즌을 팀과 함께 준비했다. 실망도 안도도 아닌 이상한 감정은 아마 윤대협의 증명할 수 없는 추측 때문이었으리라.

두 번째 시즌은 없었다. 윤대협은 일 년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귀국을 택했다. 무사히 MD를 딴 이윤이 개업은 한국에서 하기를 원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보다 조금 더 많은 복수심 때문이었다. 보수적이고 돈 많은 집 출신으로 숨쉴 곳을 찾아 떠난 도피 유학이었지만 어차피 윤대협과 결혼할 거라면 부모님 등골 마지막까지 쪽쪽 빼먹기엔 한국이 유리하다는 냉철한 계산 결과. 어차피 윤대협도 삼 년 동안 받은 연봉이며 보너스로 자산이 매우 불어난 상태였다. 정착하기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귀국 후에도 바로 결혼할 순 없었다. 이윤은 개업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윤대협도 구직해야 했다. 국내 리그 스태프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연봉 테이블을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윤대협도 개업을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의외의 인물로부터 연락이 왔다.

"와, 정말 맞네요. 윤대협 선수!"

"아하하, 선수요? 저 그거 십 년만에 들어봐요."

"아... 그렇네요. 하하. 저도 모르게 그만."

권준호였다. 북산고 5번 식스맨. 다짜고짜 고등학교 때 부르던 호칭을 외치는 사람. 덕분에 윤대협도 같이 휘말려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버렸다. 전혀 잊고 살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른다. 반짝거리던 체육관 바닥이나 북산고 유니폼의 색깔 같은 것.

"편하게 부르세요. 농구로 치면 같은 지역 선배나 다름 없는데."

"아이고, 무슨. 하하하. 사실 선생님으로 제가 모셔야 하는 건데. 너무 실례했네요."

알고 보니 권준호도 의대에 갔다고 했다. 주변에 의사 천지네. 정형외과를 개업했는데 고등학교 때 인맥으로 프로 구단과 연을 맺어 단골이 많다고. 윤대협의 경력을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 병원과 계약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연봉계약보다는 건당 커미션에 가까웠지만. 권준호는 이미 탄탄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고 설비 투자에도 적극적이었다. 프로 스포츠 선수를 1:1로 관리하는 건 거의 비급여라 부르는 게 값이다. 실력에 자신 있는 윤대협은 금방 몸값을 올릴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에선 사대보험 내 줄 사람이 중요하니까.

무엇보다 권준호는 일적으로 확실하고 감정적으로 투명한 사람이었다. 같이 일하기 더없이 좋았다. 형이라고 부르기까지 별로 안 걸렸다. 사실 고등학생 때는 인사 한 번 제대로 나눠 본 적 없었는데. 그런 사람이니까 지금까지도 고등학교 선후배 인연으로 소개 받는 환자며 구단이 넘치는 거겠지.

덕분에 윤대협의 생활은 빠르게 안정됐다. 재활 치료 외에도 따로 트레이닝 컨설팅을 받고 싶다는 의욕 넘치는 선수가 많았다. 구단 차원에서 초청 세션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NBA 경력이 아무래도 매력적인 거겠지. 윤대협도 아낌없이 노하우를 나눠주었다. 최선을 다하는 대신 자문료는 저렴하지 않았다. 뭐, 그런데 쓰려고 연봉 받는 거 다 아니까.

출퇴근이 없고 프리랜서나 다름 없는 조건인 만큼 여전히 개업으로 바쁜 이윤보다는 여유가 있었다. 윤대협이 신혼집도 구하고 플래너도 구하고. 사실 결혼식은 아무래도 좋았다. 후딱 끝내고 싶었다. 혼주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한국에서 부를 사람은 가족 빼면 별로 없다. 단골 고객인 농구선수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지경이었다.

서태웅은 생각보다 늦게 윤대협을 찾았다.

좀 기습적이었다. 일부러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서태웅이 윤대협보다 훨씬 더 놀란 얼굴이었으니까.

권준호의 병원에서 윤대협에게 프라이빗 마사지를 정기적으로 받고 있는 베테랑 농구 선수가 예약 시간을 못 지키게 돼서 후배한테 대신 가라고 했다고 미리 연락이 왔는데, 그 후배가 서태웅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서태웅에게도 윤대협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다.

정말 오랜만이네. 저런 얼굴. 나이를 먹은지는 잘 모르겠고. 코트가 아니라서 낯선 것 같다.

윤대협은 대한민국 농구팬이라면 누구나 보일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서태웅을 맞았다.

"오. 서태웅이다."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위기감이 드러날만한 반응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태웅은 그냥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반응이 느리다. 침묵이 그 틈을 채운다. 소음이 없으니 심장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서태웅이 정말 윤대협을 좋아했다면 지금도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윤대협은 먼저 침묵을 깨기로 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한 인사. 서태웅은 말없이 끄덕거렸다. 윤대협을 힐끔거린다. 아. 옷 때문인가. 병원에선 튀어 보이지 않으려고 굳이 챙겨 입는 명찰 달린 보라색 간호복이 낯선가보다.

서태웅이 인사도 없이 툭 묻는다.

"너 의사야?"

"음... 미국 의사."

갸우뚱. 누가 봐도 감을 못 잡은 얼굴이다. 윤대협은 소리내서 웃었다. 어리둥절한 서태웅을 베드에 엎드리게 하고 하지부터 접어본다. 아직 유연하네. 탄력도 있고. 옷 아래로도 오랫동안 다져 온 근육이 느껴진다. 다만 오른쪽 무릎은 분명히 수술한 흔적이 있고. 발바닥에도 피로가 장난 아니다. 이건 직업적으로 어쩔 수 없지만. 그런 반면 발목은 이 정도면 멀쩡하네. 종아리도 안 상했고. 허리 쪽이 오히려...

아. 윤대협은 그제서야 서태웅의 하체 전체를 마사지하는 동안 자신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잡담도 조언도 없이. 심지어 통증의 유무나 정도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관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흘끔 서태웅의 뒤통수를 본다. 묵묵히 엎드려 있다.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것 같다. 일단 자연스럽게 넘어가야겠다.

"무릎 괜찮아? 오른쪽."

고개를 끄덕이다가. 잘 안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뒤늦게 목소리를 낸다.

"어. 수술했어. 작년에."

"재활 잘했네. 꾸준히 관리해. 나한테 오면 제일 좋고."

서태웅은 대답이 없다. 농담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래도 상관 없지만. 허벅지에 앉듯이 올라타 손바닥으로 허리 맨 아래쪽을 지긋이 눌러 본다. 엎드린 서태웅에게서 숨을 참는 듯한 억눌린 소리가 들린다.

"허리는 어때?"

"잘... 뭉쳐."

"허리가 뭉친 건 아니고. 둔근이 뭉쳐서 그래. 잠시만."

마사지건을 가져 와 엉덩이 근섬유가 모여드는 포인트를 여기저기 지긋이 눌렀다. 아플 법도 한데 서태웅은 움찔거리기만 할 뿐 아무 소리가 없다. 잘 참네.

"여기 특별히 잘 풀어줘. 웨이트 전후에 꼭. 폼롤러보다 마사지볼이 더 좋아."

아픔을 참느라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 참는 소리를 낸다.

"알았어..."

안 본 사이에 굉장히 고분고분해졌네. 전문가 앞이라고 그런 건지. 내가 코트를 떠나서 그런 건지. 지금 서태웅도 코트에 선 게 아니라서 그런지.

시간이 갈수록 긴장이 풀렸다. 처음 만났을 때 철렁했던 건 뭐였나 싶을 정도로. 너무 오랜만이라서 머리보다 몸이 놀랐던 거겠지. 윤대협은 금방 납득할 답을 찾았다. 꿈에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이 예고도 없이 문을 열고 걸어 들어오니까.

서태웅도 이젠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별다른 물증이나 심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같이 있는 시간이 그럭저럭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상한 일은 없었고. 그때처럼 발개진 귓바퀴나 윤대협을 기다리는 얼굴 같은 것도 없었다.

그 대신 오랜 경험과 훈련과 충격과 상처가 반복적으로 새겨진 근육과 관절과 뼈가 있었다. 윤대협이 자세히 알 수 없는 서태웅의 하루하루가 서태웅의 전신에 쌓여 있었다. 서태웅이 윤대협을 좋아했었던 것 같은 그 순간으로부터 십오 년이 훌쩍 지났고 그건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신체를 이루는 거의 모든 세포가 교체될 수 있는 오랜 시간이다. 그때 윤대협이 마주했던 서태웅의 신체는 이제 없고 서태웅이 좋아했던 윤대협의 신체도 이제 없다. 이미 사라졌고 새 것으로 바뀌었다. 머리카락과 피부는 물론 장기와 근육과 뼈까지도.

그러니까 서태웅도 이제는 윤대협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서태웅이 돌아갈 때 윤대협은 결혼 날짜를 알려주었다. 그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 형이랑 같이 와. 아니다. 너네 팀에도 청첩장 받을 사람 많네. 다들 바빠서 모임은 못하겠지만."

서태웅은 묵묵히 듣다가 휙 돌아서서 가 버렸다. 고개를 끄덕였던가? 자세히 안 봐서 잘 모르겠다. 어렸을 땐 좀 더 조잘조잘 말했던 것 같은데. 굉장히 과묵한 어른으로 자랐다.

오기 싫으면 안 오겠지. 윤대협은 어깨를 으쓱했다.

서태웅을 다시 만났다. 생각보다 홀가분한 경험이었다. 머릿속에서 원치 않을 때에도 자꾸만 반복되던 환영 같은 모습보단 실제로 만나는 게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았다. 확인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생각을 이제는 그만 멈춰야 한다는 답답함과 허무함이 없었다. 회상하거나 추측하지 않아도 현재의 서태웅이 눈앞에 있다. 마음이 놓였다. 자연스러운 윤대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동안 윤대협은 서태웅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잘 따져보면 십오 년만에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결혼식은 인생에서 최고로 정신없는 경험이었다. 윤대협은 사진 찍을 때까지도 서태웅이 왔는지 안 왔는지 몰랐다.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서태웅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윤이 2부 드레스로 갈아입기를 기다려 피로연 테이블을 돌다가 권준호 뒤에 있는 서태웅의 얼굴을 딱 마주쳤을 때까지.

어 하고 아는 척을 채 하기도 전에 서태웅이 주변의 시끌벅적한 인사와 환호에 완전히 묻힐 법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해."

이상하게도 윤대협은 그 세 글자를 똑똑히 들었다. 아니 들었다고 생각했다.

내 착각이었나? 사실 축하해라고 말하지 않았나?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왜 좋아하면서 고백을 안 했는지 납득하지 못한 나머지 환청을 들었나? 신혼여행 내내 그런 고민을 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못 들은 것 같았지만.

사실 윤대협의 옆에 있던 이윤도 들었다는 건...

집들이 전날까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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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길 자처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