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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eries
2026.06.21

shape of love 2

불면의이쑤신

#상처받길 자처하는

지금이라도 집에 갈까.

서태웅은 집들이 선물의 클래식이라며 선배들이 산더미처럼 사 버린 벌크 사이즈 휴지를 양손 가득 들고 윤대협의 신혼집 현관 앞에 서서 현실도피를 했다. 당연히 이제 와서 집에 가는 선택지는 없다.

낯설었다. 저질러 놓고 후회할 일이 별로 없는 인생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앞에 두고 지금 지구에 소행성이 떨어졌으면 수준의 도피 심리에 진지하게 사로잡힌 적도 없었다.

문이 열린다. 윤대협의 반가운 목소리.

"아이고. 어서 오세요."

활짝 웃는 얼굴이 뒤따른다. 주로 북산 출신 선배들로 구성된 침입자들이 소리 높여 반가워했다. 옆집에서 뭐라 안 하나. 윤대협은 주의 한 번 주는 일 없이 환영한다. 그냥 실내에 빨리 집어 넣는 게 제일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서태웅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윤대협은 동요하지 않았다.

"왔어?"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뭘 이렇게 많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서태웅의 양손에서 휴지 더미들을 가져간다. 차려진 음식과 술을 보고 신이 난 선배들과 말을 섞는다.

손이 스쳤다. 서태웅은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태웅에게 웃어주던 얼굴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서태웅의 기억만큼. 아니 그보다 항상 더. 밝게 빛나는 듯한.

이런 것이 아름답다는 감정이라는 것을 서태웅은 최근에야 알았다.

어쨌든 윤대협은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다시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역시 못 들은 것 같다.

서태웅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한숨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던 세포 단위의 팽팽한 긴장이 그제서야 풀린 것 같았다.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을까?

서태웅은 스스로를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하필이면 그때?

부정할 생각은 없다. 윤대협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 생각보다 오래 전부터.

고등학교 땐 몰랐다. 이제 와서 알게 된 거지만 서태웅은 그때 윤대협과 농구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농구를 사랑했고 농구가 전부였고 그건 다 윤대협으로 수렴되던 시절. 넘느냐 못 넘느냐 같은 간단한 일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윤대협은 서태웅에게 질문이자 대답이었다. 투지와 즐거움, 패배감과 짜릿함, 집착과 초월, 그 모든 감정의 종착지였다. 농구 그 자체였다. 서태웅의 인생에는 농구가 전부였다.

앞으로 농구하며 마주칠 수많은 윤대협들...과 마주하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혼자서도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미련없이 바다를 건넜다. 그러면 윤대협은 거기서 종료. 이제 더 이상 떠올릴 이유가 없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서태웅은 코트에서 더 이상 윤대협을 떠올릴 필요가 없었지만. 농구에 대해서라면 그 이후에도 몇 번씩 더 조언과 깨달음과 한 단계 점프하는 다른 순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순간을 계속 반복해서 떠올렸다.

여어...

인생에서 처음으로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꼈을 때. 무작정 찾아간 학교에서도 만나지 못하고. 이제 다 포기하고 집에 가려는 순간.

눈부신 바다를 등지고 나타난 윤대협의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

그때의 마음 놓이던 기분.

빨리 농구하고 싶어서 재촉하던 자신의 발걸음과 달리 무슨 생각인지 멍하니 뒤처지던 모습. 기다려주면 또 싱긋 웃고 재빨리 따라붙어주던 다정함.

그런 것들이. 기억의 한구석에 있는 줄도 몰랐던 장면이.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될수록 찡하게 소중해졌다. 왜 이렇게 소중한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한 때는 향수병을 의심했다. 귀국했을 때 그 자리를 일부러 찾아간 적도 있다. 그럴수록 또렷하게 알게 됐다. 내가 그리워하는 건. 그 장소가 아니고. 그 시절이 아니고.

윤대협이구나. 나를 보고... 웃어 주는.

두두둥. 충격적인 진실. 서태웅은 한동안 깨달은 감정으로부터 도피를 시도했다.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착각했겠지.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하나같이 다 실패했다. 욕망이란 억누를수록 점점 더 선명해진다는 새로운 깨달음만 얻었다. 시도때도 없이 윤대협의 잔상이 떠올랐고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꿈을 지배당했으며 심지어 이게 어떤 면에선 성적인 욕망이라는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까지 알게 됐다. 속수무책이었다. 수용은 선택이 아니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다고 뭐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었다. 이미 윤대협은 없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연락이라도 시도해봤을지 모르나. 닿는다 한들 어차피 한동안은 귀국할 생각도 없고.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다 포기한 서태웅은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을 그냥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난 그럼 게이인가 보군. 하지만 아무리 미국이라도 프로 스포츠 현직 선수는 공공연하게 성 정체성을 떠들만한 업계 환경이 아니다. 그냥 이상형이나 첫사랑 얘기가 나오면 윤대협을 떠올리는 정도. 농구에만 매달려도 서태웅의 미국 생활은 빡빡하게 흘러갔다.

고백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었나? 서태웅은 확신할 수 없었다. 갈 곳 없는 마음이 신체에 쌓여 오직 과도한 운동으로만 해소되던 때라면 있었다. 그러나 윤대협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꿈에서도 본 적 없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윤대협을 찾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럴 겨를도 없었고. 서태웅의 숙제는 국내 리그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내 리그를 씹어먹어야 했다. 아무도 자신에게 기대를 걸지 않았던 NBA보다 훨씬 더 빡센 증명의 시간이었다. 무릎 통증을 참고 우승컵을 들었고 시즌이 끝나자마자 관절경 수술과 재활에 들어갔다.

비슷한 부상 경험이 있어 자주 조언을 청하던 팀 선배가 강력 추천해서 만나러 간 물리치료사가 윤대협이라니.

서태웅은 그날 윤대협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별로 없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윤대협은 서태웅을 보자마자 웃었다.

예전 그대로의 얼굴로.

그 이후로 거의 기억이 없다. 아. 하나는 똑똑히 기억난다. 미국에서 물리치료사 자격을 땄다고 했다. 심지어 선배가 추천하기로는 NBA에서 일하다 왔다고. 그 사실을 떠올리자마자 실시간으로 머리가 하얘졌다. 미국. NBA. 그렇게 가까이에 있었다고. 찾았다면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타격이 너무 컸다. 결혼 소식은 비교도 안 되는 충격이었다. 그야 윤대협이니까. 이미 결혼했을지 모른다는 상상과 뒤따르는 고통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그런데 미국에 있었다니. 그것도 NBA에서 일했다니...

지나간 일에 대해 생각해봤자 소용 없는 거 잘 알지만. 아니 잠깐. 지나간 일은 소용이 없으니까? 윤대협에 대한 미련은 접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잘 찾아봤으면 미국에서 윤대협을 만날 수도 있었다고? 그럼 지나간 일에 대해 생각해봤자... 소용 있을 수도 있다고?

뭔 소리야 이게.

자기 자신의 머릿속 궤변에 지쳐 버린 서태웅은 꿀잠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꿈 속에서 그때 그 바닷가 기차역 앞을 보았다. 꿈 속에서 서태웅은 윤대협에게 말했다.

좋아해.

꿈에서만 말하라고, 등신아.

서태웅은 윤대협의 결혼식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엎어져 조금 울었다. 그런 장면에서 그런 말을 내뱉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건 윤대협에게도, 그러나 누구보다 서태웅에게 가장 잔인한 짓이었다. 차마 혼자서도 소리내 본 적 없이. 오랫동안 소중히 여겼던 마음을. 가장 끔찍한 순간에 들켜 버리다니. 변명할 수 없는 죄가 되어 버리다니.

그 말을 했을 때 윤대협의 얼굴이 기억 나지 않아서 불안했다. 확인했어야 했는데. 눈앞이 물리적으로 하얘져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들었을까. 아니겠지. 바로 앞에 있던 권준호 선배조차 못 들었다. 아예 서태웅이 아무 말도 안 한 줄 알고 애들 축하할 때 너도 한 마디 해주지 그랬냐고 했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혼여행 간 사람에게 혹시 들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 진짜로 그러고 싶어질까봐 서태웅은 윤대협의 전화번호도 알아보지 않았다. 행동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야 했다. 원래 말보다 주먹, 아니 행동이 빠른 편이긴 하지만. 주둥이도 빠른 줄은 불행하게도 처음 깨달았으니.

설상가상으로 두 달 후에 북산 선배들이 윤대협 신혼집들이가 드디어 잡혔다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농구 시즌을 배려한 날짜가 아주 마음에 든다며 올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잔뜩 마시겠다고.

서태웅은 가겠다고도 안 했는데 이미 참가 멤버로 확정이었다. 아무래도 결혼식에 갔기 때문이겠지. 팀 훈련 일정도 거의 다 공유되고. 권준호가 있어서 무릎 아프다는 핑계도 안 먹힐 거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불참 이유를 지어낼 수 없었다. 사실 제가 결혼식 당일에 새신랑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한 쓰레기라서요. 이럴 수는 없으니까. 서태웅은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 없었다. 아무도 못 들었다면 그 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은 알아서 끝낼 것이다.

결론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막다른 곳에 닿으니 한 바퀴 돌아서 긍정적인 사고로 전환된다. 너무 오래 질질 끌었던 게 문제다. 이보다 더 망할 수 없는 고백도 차라리 잘 된 일일 수 있다. 기왕이면 행복한 신혼부부의 모습도 보러 가자. 적응하면 돼. 어린 시절 첫사랑 같은 거. 어차피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아파야 정신도 차리겠지. 서태웅은 고통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윤대협이 듣지만 않았으면 돼. 그것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이며 꼭 피하고 싶은 불안 요소였다...

"제수씨는?"

"여행 갔어."

"헐~ 진짜?"

"친구들이랑 국내 여행. 편하게 놀고 가라고."

"와... 센스 미쳤다..."

"너희가 귀찮게 할까 봐 도망간 것 같아. 머리가 좋거든."

"그래 소원대로 너를 엄청 귀찮게 해줄게~"

"잔뜩 처먹고 갈테니 제수씨 오기 전에 윤대협이가 혼자 다 치워라~"

신부가 없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데. 서태웅은 조금 당황했다.

다른 이들이 삼삼오오 집 구경을 하는 동안 현관에 있는 작은 웨딩 액자를 묵묵히 바라본다. 그다지 과시할 마음 없이 디퓨저 같은 소품 사이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다. 활짝 웃는 윤대협과 신부. 사진 속에 서태웅은 없다. 그냥 그럴 기분 아니라서 안 찍었다. 지금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워지지 않는 범죄 증거를 남길 뻔했다. 볼 때마다 자기 혐오를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함께 찍힌 자기 얼굴을 뚫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런 종류의 고통을 감내하려 온 자리였다. 행복한 신혼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집에 가면 또 조금 눈물이 나올지라도. 아무리 서태웅이라도 오랜 첫사랑을 눈물 한 방울 없이 잊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신부가 없다...

윤대협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다. 음식은 백퍼센트 배달이며 필요하면 얼마든지 더 시켜주겠다고. 서태웅은 윤대협이 따르기 전에 몰래 자작했다. 서태웅 차례가 와서 병을 기울이려던 윤대협이 멈칫한다. 미안하지만 오늘 윤대협과의 상호작용을 최대한 없앨 생각이다. 또 무슨 망령이 씌어서 헛소리를 지껄일지 모르니.

소리 높여 건배.

서태웅은 술자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없었다. 윤대협과의 상호작용을 최소화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차라리 술이나 마셔야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진짜로 잠들어 버리다니.

"어."

눈을 떴을 때... 윤대협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일어났어?"

시야가 선명치 않고 대단히 좁다. 몽롱한 기분. 아무래도 꿈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고 일어났을 때 윤대협의 다정한 얼굴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리가.

꿈이라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잖아.

서태웅은 잠결처럼 자연스럽게 두 팔을 뻗어 윤대협의 상체를 끌어 안았다.

단단하고 묵직한 가슴팍이 꾹 맞닿았다. 따뜻하다. 처음 느껴보는 체취가 비강을 지나 폐를 가득 채운다. 규칙적인 심장박동의 진동이 얇은 옷 두 겹을 넘어 어렴풋이 서태웅의 심장을 직격한다. 두근. 두근. 두근.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의 감각이다.

서태웅은 윤대협의 상체를 있는 힘껏 밀어젖히며 거실 바닥에 누워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윤대협도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서 어디론가 저벅저벅 걸어간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울리고 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이건 숙취가 아니다. 취기라고 할 만한 것은 조금 전에 완전히 깼다. 이마 꼭대기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제발 취한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그토록 떨치고 싶었던 죄책감. 후회. 외로움. 순식간에 서태웅의 전신을 재점령한다.

동시에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따스한 이완. 짜릿한 환희. 영혼의 모든 결핍이 순식간에 채워진 듯한 충족감. 방심하면 눈물이 찔끔 샐 것 같았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알 수 있었다.

이거였어. 이게... 내가 원하는 거였어.

갑자기 허공에서 물잔이 나타났다. 윤대협이다. 서태웅은 앞뒤 따지지도 못하고 덥석 받아들었다. 제법 많이 가져다 줬는데 아무리 마셔도 부족해 정신 차리고 보니 원샷해버렸다. 윤대협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더 줄까?"

서태웅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윤대협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올까봐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심장이 관자놀이에서 내려 올 생각을 안 한다.

윤대협이 손을 내밀기 전에 서둘러 일어서다 조금 비틀거렸다. 윤대협이 팔뚝을 잡아주려 해서 재빨리 뿌리쳤다. 더 이상 접촉하고 싶지 않다. 프로페셔널하기 그지없었던 마사지 감각조차도 자기 전에 종종 떠올라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무 다정해. 그게 문제다. 심각한 문제다. 유부남 주제에. 아무런 경계심도 없고. 게이가 아니니까 그런 거겠지만. 서태웅을 그런 쪽으로 고려한 적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만...

"준호 선배. 가요."

택시를 같이 타고 온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아무 대답이 없다. 조용하다. 아까부터 그랬나...?

"아까 다들 갔어. 너는 깨우면 큰일 난다고... 재워주라던데."

아무것도 모르는 윤대협이 다정하게 지껄인다. 슬슬 짜증이 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배들에게. 그야 아무것도 몰라서 천만다행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원흉은 권준호다. 본인 병원에 윤대협이 물리치료사로 왔으면 왔다고 진작 말을 해줬어야지. 그럼 처음부터 얼씬도 안 했을 텐데. 정말로 얼굴 보러 한 번도 안 갔을지는... 자신없지만. 어쨌든. 그럼 결혼식 초대도 안 받았을 거고. 초대를 받았는데 안 가면 이상할 것 같아서 억지로 가지도 않았을 거고. 이상한 소리도 안 했을 거고. 집들이 멤버에도 없었을 거고. 아까도...

서태웅은 충동적으로 두 손을 머리칼에 집어넣고 마구 헝클었다. 돌발적인 미친 짓에 윤대협은 놀라지도 않는다. 다정하게 어깨에 손을 얹으려 해서 얼른 피한다.

"자고 갈래?"

미친 소리 하지 마라...

속으로만 일갈하며 서태웅은 현관으로 가는 방향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집 구조를 조금 헤맨 끝에 신발을 신는다. 들어올 때 현관을 꽉 채웠던 신발들은 다 사라지고 제 것보다 훨씬 큰 신발, 훨씬 훨씬 작은 신발만 남아있어 찾기 편했다. 집주인 부부의 신발이다. 부부. 약간 토할 것 같다. 빨리 집에 가서 토하고 자야지. 눈물이 난다면 그건 구토가 괴로워서일 것이다.

벌떡 일어선 서태웅 뒤에서 윤대협이 따라나온다. 인사도 없이 나가려던 서태웅은 멈칫했다. 대충 발끝을 보면서 중얼거린다.

"갈게. 나오지 마."

"바래다 줄게."

경악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윤대협을 쳐다보고 말았다. 다행히 신발 신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어 뒤통수만 보였다. 얼른 눈을 돌리고 문 손잡이를 누른다.

"됐어."

이거 왜 안 열려. 덜컥거리기만 하고. 당황한 사이에 윤대협의 손이 뒤에서 슥 나온다. 뭔가 버튼을 누르자 삐리릭, 소리가 나더니 쉽게 문이 열렸다. 버벅거리는 사이 윤대협이 재빨리 빠져나가 이미 올라와 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서 열림 버튼을 누른다.

"얼른 와. 지하철 가는 길 모르잖아."

"택시 탈 거야."

"그럼 택시 잡기 편한 곳 알려줄게."

그런 건 나도 지도 보면 알아. 서태웅은 그렇게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대꾸도 귀찮다. 무시가 답이다. 전신으로 윤대협을 외면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계단을 택하기엔 너무 고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 내리자마자 서태웅은 저벅저벅 앞서 나갔다. 뒤에서 윤대협이 이쪽이 방향이 어쩌구 부르는데 신경도 안 썼다. 사실 어디여도 상관 없다. 나중에 지도 보면 된다. 일단은 좀 걸어야겠다. 그저 정처없이 걷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여차하면 중간엔 좀 뛸지도 모른다.

"서태웅."

저 거머리 같은 건 왜 아직도 따라오고 있어. 좋아하는 상대에게 폭언을 퍼부으며 서태웅은 걸음을 빨리했다.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윤대협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서 무섭다. 여기서 떨치지 못하면. 그러면...

"서태웅."

멀리서 부르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너무 귓가다. 관자놀이에서 뛰던 서태웅의 심장을 바닥으로 내팽개친다. 발로 차 버리는 편이 덜 아플 것 같다.

"어딘 줄 알고 가. 너..."

"좀 닥쳐. 머리 울려."

그제서야 입을 다문다. 조용해지니 한결 기운이 난다.

윤대협은 집으로 돌아갈 기색이 없다. 서태웅이 취한 연기를 너무 잘한 것일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사지 멀쩡하게 걸을 수 있는 걸 눈으로 보고 있지 않나. 택시 부른다는데 뭘 어디로 바래다 준다는 건지. 설마 택시 탈 때까지 안 갈 생각인가. 여자 만나는 것들은 다 이런 버릇이 있나. 그렇지도 않던데.

뭘 하려고 자꾸 따라오는 거야.

그냥 포기하고 당장 택시를 불러야겠다. 아무데나 내려달라고 해서 걷지 뭐. 서태웅은 우뚝 멈춰서서 휴대폰을 꺼냈다. 택시앱을 찾느라 잠시 방황하는 손가락. 정서가 불안정해 다소 느려진 서태웅의 인지능력은 원하는 걸 한 눈에 발견하지 못했다.

턱. 두터운 손등이 핸드폰 화면을 한 번에 가린다.

서태웅은 어금니를 꾹 물었다. 절대 고개를 들면 안 된다.

윤대협의 담담한 목소리가 사형선고처럼 떨어진다.

"잠깐만... 나한테 시간 내줘."

"싫어."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튀어나갔다. 위기다. 도망쳐야 한다. 서태웅의 본능이 미친듯이 경고했다. 어서 택시를 잡아야 하는데. 이 빌어먹을 손 좀 치웠으면 좋겠는데. 휴대폰을 좌우로 휙휙 떨궈내려 했지만 윤대협의 손목은 꿈쩍도 안 한다.

"잠깐만."

윤대협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서태웅은 두통이 올 정도로 어금니를 꽉 물었다.

"부탁이야."

그렇게 간절한 목소리는 반칙이지.

서태웅은 거절할 수 없다. 그럴 권한이 없다.

사실은 윤대협과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하니까.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제자리에서 묵묵히 움직이지 않는 서태웅을 조심스럽게 잡아 당긴 윤대협이 도착한 곳은 아파트 입구의 편의점 앞 야외 테이블이었다. 윤대협은 서태웅을 앉혀 놓고 잠깐 사라지더니.

탁. 테이블에 맥주 500ml 캔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서태웅은 캔 하나를 딴 윤대협이 그 자리에서 원샷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강인한 턱이 점점 위로 올라가며 꿀렁거리는 목울대를 훤히 드러낸다.

후아. 종잇장처럼 구겨진 맥주잔과 함께 깊은 한숨을 내려놓은 윤대협이 서태웅과 눈이 마주치자 픽 웃었다.

평소처럼 다정하고 예쁜 미소가 아니었다.

서태웅은 왠지 안심이 됐다.

윤대협이 맥주 한 캔을 더 딴다. 묵묵히 지켜보던 서태웅도 손을 뻗었다. 윤대협이 또 픽 웃는다. 서태웅은 개의치 않았다.

건배 같은 것 없이 동시에 들이킨다. 시원하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고 테이블에 맥주잔을 콱. 내려놨을 때. 서태웅은 오랫동안 참던 숨을 비로소 내쉬는 것 같았다.

방금 전에 전신이 호소했던 위기감을 드디어 이해했다. 윤대협은 직면하려는 것이다. 서태웅이 필사적으로 없었던 것으로 하려던. 그 모든 사실을.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다. 윤대협은 추궁할 준비가 끝났다. 서태웅은 교수대 앞에 서 있다. 윤대협이 발 밑의 의자를 걷어찰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고통은 필요한 과정이다. 접는 데엔 도움이 될 거다. 서태웅은 익숙한 체념에 마음을 놓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맥주만 마셨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무도 화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맥주캔만 하나씩 구겨졌다.

두 캔 정도 남았을 때. 윤대협이 말했다.

"피로연 때 나한테 한 말 있잖아."

서태웅의 심장이 두 개로 쪼개졌다. 하나는 관자놀이로. 다른 하나는 발바닥 아래 아스팔트로 처박힌다. 맥주 덕분에 다시 오를 수도 있었던 취기가 싹 사라졌다.

윤대협의 무표정한 눈동자가 서태웅을 집요하게 바라본다.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하면 바로 들킬 것 같다. 일부러 힘 준 목소리로 다그치듯이 묻는다.

"축하해, 라고 말했던 거지?"

"과연."

서태웅의 주둥이가 뇌의 검토를 거치지 않고 내뱉어 버린다. 하지만 감탄은 진짜였다.

"그런 방법이..."

진작 알았다면 그렇게 우겼을텐데. 서태웅은 상상도 못한 알리바이였다. 역시. 머리가 좋단 말이지.

윤대협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고등학교 때도 본 적 없는 싸늘한 얼굴이었다. 다시 죄책감이 서태웅을 점령한다. 저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서 없었던 일로 하려고 했는데. 윤대협이 맥주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알루미늄이 구겨지는 소리가 난다.

"아니지. 거기선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상관없잖아. 이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고?

"너야말로."

서태웅은 불길 같은 분노가 취기로 달아오른 눈가를 차갑게 식히는 것을 느꼈다. 맥주 한 캔을 더 까서 마신다. 차가운 열기를 더 차갑게 식힌다. 내던지듯이 맥주잔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시원한 소리가 굴러간다.

서태웅은 심란한 표정의 윤대협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을 골랐다. 혹여라도 취한 사람으로 착각할 일 없도록.

"굳이 확인하지 마. 좋도록 생각해. 너 편한 걸로."

"내가 편한 게 뭔데."

"축하한다고 말했어. 됐지?"

"하나도 안 됐어."

윤대협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친다. 구겨진 알루미늄 캔들이 테이블과 함께 움찔인다.

하나도 안 됐다고. 그렇게 다시 한 번 중얼거리는 윤대협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다.

왜 네가 화를 내는 거지?

서태웅은 혼란스러웠다.

침묵이 차분하게 두 사람의 감정을 식힌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문지르던 윤대협이 입을 열었다.

"왜... 전에는 말 안 했어?"

많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서태웅으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그래서 서태웅은 말에 실린 감정이 아닌 말의 의미를 생각하기로 했다.

전에. 그게 언제지. 서태웅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결혼식 전에? 마사지 받으러 가서 다시 만난 날? 그 전에 둘 다 미국에 있었을 때? 아니면... 너를 좋아한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네가 아직 내 옆에 있었을 때...

서태웅은 많은 장면을 떠올렸다. 가끔은 꿈에 나왔던, 어떨 땐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야 했던. 그러나 끝내 그러지 못했던. 윤대협이 나오는 많은 장면들.

수많은 기억과 감각과 단어를 지나친 끝에 되물었다.

"뭐가, 달라져?"

내가 좀 더 빨리 말했다면. 좀 덜 멍청하거나. 그래서 너에 대한 마음을 빨리 알았다거나. 뒤늦게라도 너를 찾았다거나. 어떻게든 이런 멍청하고 견딜 수 없고 한심한 마음을 전했다거나. 그랬다면.

그러면 달라지는 게 있어?

비난도 의심도 아닌 순수한 의문이었다. 윤대협은 당황한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숙이면서 중얼거렸다.

"모르지. 나도."

그런 약한 소리나 하면서. 서태웅은 조용히 공감하며 윤대협의 푹 숙인 머리꼭지를 바라보았다.

"왜 진작. 말을 안 했어."

윤대협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놀랍게도 조금 떨렸다.

서태웅은 한 캔 남은 맥주캔을 땄다. 천천히 한 모금을 마신다.

서태웅은 진심으로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다. 실언은 물론 윤대협을 향한 자신의 마음까지 통째로. 그만큼 윤대협을 좋아했다. 윤대협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다소 고통스러운 정도는 뭐 참을 수 있었다. 지은 죄가 많고.

아예 그 가능성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안 되는 일이었다. 확인 사살 같은 부정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서태웅은 아무 말도 안 한 거다. 윤대협은 듣지 못한 거다. 그렇게 지나가기를 바랬다. 윤대협도 그럴 거라고 믿었는데.

아니었다. 윤대협은 끝내 그 일을 꺼내서 들이밀었다. 서태웅이 저 멀리 치우려던 칼날 같은 마음을 꾹 쥐고 놔주지 않는다. 기꺼이 피를 흘린다. 그렇게까지... 마주봐 주기를... 단 한 순간도 감히 바란 적 없었다...

서태웅은 손이 떨리지 않도록 맥주잔을 꾹 쥐고 입을 열었다.

"처음엔..."

목소리까지 떨리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윤대협이 고개를 든다.

"처음엔 싫은 줄 알았어."

"내가?"

"아니. 너를 좋아하는 게."

윤대협의 눈이 커진다. 그래. 드디어 똑바로 말했다. 십오 년 만에. 내가 벼린 칼날 같은 마음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서태웅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

"그거랑 그건 달라. 너를 싫어할 수는 없었어..."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멀쩡한 척, 아닌 척, 혼자 있을 때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꼿꼿하게 무시하며 견뎌왔던 보답받을 수 없는 사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무너진다.

서태웅은 남은 캔맥주를 원샷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참아왔던 한 마디를 신음처럼 내뱉었다.

"미안해."

손 안에서 맥주캔이 구겨진다. 윤대협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말하지 말았어야 되는 거 알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한 마디를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다. 댐이 터져버린 듯 격해진 감정 사이로 드문드문 이어지지 못하는 문장이 힘주어 떨어진다.

"나도 내가 그럴 줄 몰랐어.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어. 말하기 싫었어. 그래서 피했는데. 그러면 없어질 줄 알았어. 잊어버릴 줄 알았어."

"나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대협이 물었다. 서태웅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윤대협의 커다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백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윤대협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진다. 서태웅은 더할 수 없는 캄캄한 절망을 느꼈다.

그래도 다 말하니까 속은 시원하네. 드르륵 플라스틱 의자를 밀며 일어선다. 윤대협이 금방 따라와 손목을 붙잡았다. 냉정을 되찾은 서태웅은 뿌리치지도 않고 조용히 말했다.

"택시 잡았어."

"거짓말."

윤대협은 간발의 차도 없이 반박한다. 꾹 잡은 손목을 놔줄 생각이 없다. 너무 힘 줘서 벌써 조금 저린데. 하루라도 자국이 남으면 서태웅에겐 좋은 일이다.

서태웅은 윤대협을 달래듯이 말했다.

"나 괜찮아."

"그것도."

윤대협의 집요한 눈동자는 역시 거짓말을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태웅은 윤대협이 정말로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러려면 여기서 돌아서야 했다. 아무리 다정한 사람이라도 집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새로운 가족이 돌아올 곳으로.

"괜찮을 거야."

이번엔 거짓말이 아니었다.

윤대협은 한참 동안 서태웅을 놔주지 않았다. 서태웅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감정을 다 터뜨린 건 서태웅 뿐이다. 자신이 저지른 짓에 비해 윤대협은 충분히 화를 내지도 따지고 들지도 서태웅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 감정을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서태웅이 잘 아는 과정이었다.

윤대협의 손이 점점 아플 정도로 서태웅의 손목을 꽉 쥔다. 진짜로 자국 남겠는데. 서태웅은 싫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괜찮아지고 싶어?"

하지만 윤대협이 꺼낸 말은...

"너 혼자?"

떨리는 목소리로 꺼내는 말은...

"그건 아니지."

서태웅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안 괜찮아."

윤대협이 서태웅의 손목을 놓았다. 움찔거릴 새도 없이 빠르게.

서태웅의 상체를 콱 끌어안는다. 굵직한 팔뚝이 단단하게 서태웅을 조여온다. 맞닿은 가슴팍이 뜨겁다. 서태웅의 심장처럼 뛰고 있다. 두근. 두근. 두근.

"나는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귓가에 떨어지는 목소리가 거짓말 같다.

"없어졌다고 믿고 있었는데..."

꿈이 아닌 것 같은데. 서태웅은 멍하니 윤대협의 말을 따라가려고 애썼다.

"네가 책임져야 돼."

책임?

서태웅의 어깨를 붙잡고 상체를 조금 떨어뜨린 윤대협이 눈을 맞춰 온다. 너무 가까워. 그게 서태웅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고. 속눈썹이... 젖어있어. 그게 두 번째로 한 생각이었다.

"괜찮지 말아주라. 조금만 더."

심장이 입술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서태웅은 입술 끝에 꾹 힘을 넣었다.

윤대협이 자신의 왼손을 만지작거린다. 서태웅의 오른손을 가져가더니. 손바닥 안에 뭔가 쥐어주었다.

반지네.

왼손에 있던 반지...

서태웅은 잠시 굳었다.

윤대협은 더 이상 서태웅을 만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주 본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서태웅은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반지를 집었다. 오른손으로 윤대협의 왼손을 가져와. 약지손가락에 다시 끼워주었다. 살짝 패여있던 자국에 반지가 안착한다. 원래 있었던 자리니까.

"그 말. 잊어버릴 거야."

윤대협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서태웅이 말했다.

"이거 돌려주고 올 때까지."

결국 서태웅은... 윤대협을 거절할 수 없다. 그럴 권한이 없다.

오래 전부터 좋아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한 번도 없었던 방식으로.

원치 않는다 해도 이미 다 줘버린 마음이니까.

윤대협이 다시 한 번 서태웅을 끌어안았다. 하아아. 서태웅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은 한숨을 푸욱 내뱉는다. 오랫동안 참았던 숨을 내뱉는 것처럼.

서태웅은 윤대협의 상체를 꾹 밀어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물었다.

"후회 안 해?"

서태웅은 여전히 기회를 주고 싶었다. 윤대협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방해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다 죽여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각오는 되어 있었다.

정작 윤대협은 벌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다.

"의심돼?"

서태웅은 잔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평생할 걸."

언제든지 후회할 수 있는 선택. 사실 후회밖에 없을 듯한 선택. 윤대협이 이제 와서 행복한 결혼을 깨고 서태웅을 선택한다는 건 그런 의미다. 지금이라도 돌아서면 정신 차리지 않을까. 마치 반지를 돌려주고 오면 받아 줄 것처럼 말했지만. 서태웅은 정말로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 기회까지 차 버리고 온다고 해서. 영원히 그럴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한 번 마음을 바꾼 사람이 두 번은 못 바꿀까? 서태웅은 윤대협을 좋아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윤대협이 천천히 자기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서태웅이 끼워 준 반지를 도로 꺼낸다. 오른손 주먹에 넣은 채로 꾹 쥐어보인다. 멋진 플레이를 펼친 뒤 파이팅을 주고 받을 때처럼.

"괜찮아. 나는 안 해."

자신만만하게 웃는다.

윤대협은 아마도 바보가 확실하고...

어쩌면 조금은 윤대협도...

서태웅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